인조반정으로 새로운 국왕이 즉위한 후 조선 사회는 한동안 어수선한 상황의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롭게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 사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이전투구(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개들처럼 다투는 모습)가 발생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이괄의 난이 발생했고, 조선 사회의 혼란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지 3년 차에 여진족이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부릅니다. 정묘호란의 뜻은 정묘년에 오랑캐가 쳐들어온 사건을 의미합니다. 당시 조선은 광해군 때 임진왜란부터 사르후 전투,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면서 국력이 매우 쇠약한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여진족은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후 후금을 세워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였는데요.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침공했고, 명나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후금 토벌에 나서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합니다. 이때 조선에서는 강홍립에게 군사 약 1만 8천을 주어 명나라를 지원하게 했는데, 사르후 전투에서 약 1만 명이 전사하는 참담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때 강홍립은 피해를 막기 위해 누르하치에게 항복했고, 광해군은 후금의 국력을 인정하면서 중립주의 외교 노선을 선택하게 되죠.
하지만 인조반정 후 광해군이 폐위되고,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천명하면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은 결국 후금을 자극하고,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요. 1627년 2월 23일 후금의 장수 아만은 군사 3만을 일으켜 광해군이 폐위된 사건을 명분 삼아 조선인을 길잡이로 활용해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합니다.
후금은 압록간을 건너 의주성(3월 1일), 정주성(3월 2일), 안주성(3월 8일) 그리고 평양성(3월 10일)을 순식간에 점령합니다. 조선군은 후금의 막강한 군세에도 용맹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패배하였고, 개성까지 후퇴합니다. 이때 중앙에서는 인조와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 분조 활동을 합니다. 나라의 위기가 닥치자 의병들이 일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사즉생의 각오로 후금의 후방을 교란합니다.
후금은 속전속결로 조선을 점령하는 작전을 세우고 침공하였으나 전쟁이 장기전 양상을 띠게 되자 곤란을 겪게 됩니다. 무엇보다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후방을 위협당하자 장기전을 할지 혹은 전쟁을 끝낼지 선택에 놓입니다. 후금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평산에 머무르면서 조선에 화의를 제의합니다.
후금이 제시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후금에 압록강 이남 변경 지역 땅을 할지 할 것, 2. 명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3. 명나라 토벌에 조선 군사 3만 명을 지원할 것 등의 조건을 걸었습니다. 조선 측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자와 이를 반대하는 척화론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조선은 더 이상 후금을 상대할 수 없어 결국 화친을 맺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후금군에 평산을 넘지 말 것, 맹약 후 후금은 즉시 철군할 것,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지 말 것, 양국을 형제국으로 칭할 것 등의 조건을 걸고 화친을 맺습니다.
후금은 조선과 화친 조약을 맺은 후 철군하는데, 이를 정묘약조라고 합니다. 후금은 3만의 적은 병력으로 침략했기 때문에 조선에서 전쟁이 길어질수록 고립될 위협이 있어 급하게 화약을 맺었으나 후금 입장에서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병자호란이 다시 발발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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