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9 - [★☆문학정보☆★/조선시대:)] - 정묘호란(+누르하치, 소현세자, 인조, 연인, 이괄의 난)
조선은 정묘호란을 겪은 후 정묘약조(혹은 정묘화약)를 성립하게 되는데요. 조선과 후금은 서로의 입장 차이로 일시적인 화친에 불과했습니다. 조선의 경우 군사적으로 감히 대항을 할 수 없기에 일시적인 굴복이었고, 후금은 명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기에 조선에서 오랜 시간 군사 작전을 할 수 없어 조선을 굴복시킨 성과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각종 물자를 바쳐야했습니다. 잠깐의 평화가 다가온 것 같았으나 조선 조정은 폭풍전야와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요.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여전히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고 있어 후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양국관계를 "형제 관계"에서 "군신 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더 많은 전쟁 물자(황금, 백금 1만 냥, 전마 3,000 필, 정병 3만 등)를 요구하게 됩니다. 광해군 때 조선이 명나라에 보낸 지원군이 2만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어려운 요구임을 알 수 있는데요. 전쟁의 명분... 즉 트집을 잡기 위한 요구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후금이 번번히 맹약 이상의 요구와 수시로 변경을 침략해 민가를 약탈하는 등 후금에 대한 여론이 매우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금이 사신 용골대와 마부태 등을 조선으로 파견해 군신 관계로의 개약을 요구했고,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분개하여 군사를 일으켜 후금과 결전할 의지를 내비치게 됩니다.
후금의 사신들은 적당히 겁박을 하면 조선이 벌벌 길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탈출을 시도합니다. 문제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조선 조정이 평안도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이 탈취당하게 되는데, 유문에는 전시에 대비해 병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군비를 손질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홍타이지는 대노하였고,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1636년 4월 11일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였습니다. 조선에서 회답사와 춘신사가 방문한 상황이었는데, 이들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조선 사신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국서를 조정에 전했고, 조정에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로 높아지게 됩니다. 내부적으로 주화파와 척화파가 격렬하게 토론하였고, 결국 척화파가 득세하게 되는데요.
전쟁이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척화파는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였어야 했지만 목소리만 컸지 전쟁 준비는 미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해 12월 1일 청 태종(홍타이지)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약 12만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 왔습니다. 조선 측은 임경업에게 약 4,000명의 병력을 의주부의 백마산성에 배치하였으나, 청군은 이를 무시하고 남하해 4일 만에 개성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곧장 한양으로 진격하는데요.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장계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12일이었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평양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격적으로 쳐내려온 것인데요. 만약 조선군이 충분하게 전쟁 대비를 했다면 이러한 전격전 전략은 후방이 막혀 몰살당할 수 있는 위험한 전략이었으나 청군은 이미 조선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청군의 평양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안 조정은 그야말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도성 내 주민들은 급히 피난길에 올랐고, 인조는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날밤 자신도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차단되어 세자와 조정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됩니다. 시간을 끌면서 강화도로 떠나려고 했으나 폭설로 인해 고립되게 되는데요.
남한산성에서 약 1만 3천의 병력으로 저항을 위해 준비를 하는 사이, 청군이 남한산성에 도착합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한 후 약 40일 정도를 기다렸다고 하는데요. 중간중간 국지전이 있었으나 큰 의미가 없는 전투였으며, 혹한의 추위로 인해 점차 병사들의 사기가 내려가고, 군량 부족으로 굶어 죽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외부에서 국왕을 구하기 위해 의병들과 근왕병이 일어났으나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장수가 없어 각개 격파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끝까지 항전을 하자 청군은 강화도를 침략해 항복을 받아내게 되면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옵니다. 이와 함께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공족과 척화론자를 끌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약탈당하고, 조선 여인들이 납치를 당하게 되죠.
이러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슴아픈 역사속에서 드라마 '연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드라마 속 가상의 인물인 이장현을 따라 병자호란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도 드라마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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