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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과 충녕대군 그리고 효령대군

알풀레드 2022. 4. 1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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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국왕 태종 이방원은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7명의 왕자와 4명의 공주를 낳았습니다. 국왕에 즉위하기 전 사가에서 3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장남 이제(훗날 양녕대군), 차남 이호(효령대군), 삼남 이도(충녕대군, 훗날 세종) 그리고 이종(성녕대군, 어린 시절 요절)이 기록에 남게 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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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 이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양녕대군이라고 하면 조선사에서 끝판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형으로써 동생의 재능을 알아채고, 스스로 망나니짓을 하면서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세제 자리를 양보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온갖 악행을 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데요. 그 이유는 조선 중기 이후 왕실에서 후손들을 위해 양녕대군과 세종대왕의 일화를 일부 조작해 양녕대군을 긍정적인 인물로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백성들에게 왕실에서 개망나니 짓을 하다가 폐위된 왕자의 이야기가 알려지면 그만큼 쪽팔린 일이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렇게 양녕대군에 대해 미화된 기록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역사학자를 제외하고는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 양녕대군의 악행들이 알려지면서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생겨나고 있으며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양녕대군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인물의 성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이방원의 장남 이제(훗날 양녕대군)는 조선왕조에서 최초로 장자 승계 원칙으로 왕세자에 책봉된 인물입니다. 문제는 세자에 책봉된 후 온갖 사고를 치다가 폐세자가 되어 셋째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정통성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죠. 장자 승계 원칙에 따르면 이제 다음 순위는 효령대군이며, 효령대군의 아들들 역시 충녕대군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기 때문인데요. 태종 이방원은 이런 부분에 대해 다행히 잘 정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세자 이제는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3명의 형들이 어린 시절에 요절했기 때문에 큰 상심을 하다가 얻은 자식이었고, 혹여나 이제가 요절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끔찍하게 아낀 것이죠. 다행히 세자 이제는 건강하게 자랐고, 이어 태어난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역시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는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역시 사랑으로 대하였으나 장남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1404년(태종 4년) 이제는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세자가 된 이제는 궁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세자의 성격은 자유분방하고 예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향후 군왕이 되기 위해서는 각종 경연(경전을 공부하는 자리)과 서연(세자에게 경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지루함을 느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태종 이방원은 어릴적부터 사랑했던 아들이 실수를 하는 것에 대해 관대하게 대했고, 실록에 이에 대해 속상해하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세자가 경연을 게을리 한 것은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기생들과 놀고 매 사냥을 즐기면서 각종 사고를 치게 되면서 폐세자를 거론하게 되었는데요. 태조 이성계가 개국하고, 이복 형제를 살해한 후 조선을 반석 위에 올린 태종 이방원은 개인의 감정보다는 다음 국가의 안녕을 위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죠. 다행인 점은 충녕대군이 군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왜 세자는 이렇게 삐뚫어지게 된 것일까요? 우선, 세자의 자질 자체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궁중 생활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장남이라는 자리에서 앞으로 국가의 지존이 되기 위한 책임감 역시 세자를 짓눌렀던 것 같습니다. 또한, 태종이 세자를 위해 외척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양위 파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삼촌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과정을 보고 삐뚤어졌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양위 파동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세자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석고대죄를 하여야 하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이죠. 

 

출처. 태종 이방원

 

결국 이런 스트레스가 폭발한 것인지 공부를 게을리하고, 남의 첩을 세자의 권세로 빼앗는 패륜적인 행동을 하는 등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결국 태종 이방원은 세자를 폐위시키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선택을 하게 되죠. 태종 이방원은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 후에도 꾸준히 사고를 치게 되자 감시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충녕대군이 세종이 된 후 그런 형을 끝까지 돌보아 주었는데요. 신하들은 양녕대군이 문제를 꾸진히 문제를 일으킴에 따라 벌을 주라고 상소를 올렸는데, 세종은 끝까지 형을 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의 아들들은 평소 교우 관계가 좋다고 알려졌지만 분명한 것은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군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시기하여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폐세자가 된 후 양녕대군은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만약 세종이 양녕대군을 제거했다면 당대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세종의 유일한 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출처. 태종 이방원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일화는 여러가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효령대군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폐위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책을 펴고 공부를 하는 척했느냐 양녕대군이 헛짓거리하지 말라는 꾸짖음을 들은 후 세자 자리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는데요. 사실 이런 이야기는 효령대군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일화입니다. 정치적 배경이 없던 효령이 왕위를 욕심내었다는 정황이 전혀 없기 때문이죠. 다만 효령대군은 지나치게 점잖은 성격으로 국가를 통솔할 리더십이 없다고 판단을 내린 태종은 효령대군이 아닌 충녕대군을 선택하게 됩니다. 효령대군은 불교에 심취하여 공부를 했다고 하네요.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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