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조선 중기 광해군(1608년 3월 17일 ~ 1623년 4월 13일)과 인조(1623년 4월 13일~1649년 6월 17일)의 재위 기간에는 임진왜란, 사르후 전투 참전,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국내외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은 조선 백성들의 삶은 매우 고단하게 만들었죠.
특히, 대륙에는 명나라의 쇠퇴와 함께 만주족이 일어서면서 조선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요. 변방의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이 대통합을 이루면서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였고, 만주족의 숙원이었던 중원으로의 진출을 꿈꾸게 됩니다. 만주족은 강력한 기마대를 소유한 유목민족 출신이었으나 척박한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중국 인구의 1/10도 되지 않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한번 군사를 일으켜 원정을 나가려고 한다면 본진을 수비할 병력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후방에 있던 조선과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죠. 역사적으로 중국은 늘 강력한 힘을 가졌던 오랑캐들을 다루기 위해 이이제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왔는데, 신흥 강국들이 중국 침략을 위해 원정을 나간 사이 주변 국가들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만주족이 세운 후금의 홍타이지는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공격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침략을 준비합니다.
정묘호란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 후 이를 지지하던 기반인 서인들은 광해군의 대외 정책을 버리고, 향명배금의 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광해군은 재위 기간 동안에는 가능하면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보여왔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친명 정책은 유지하되 후금과의 관계 역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이죠. 사르후 전투에서 무능한 명나라 군대의 모습과 후금의 강력한 군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광해군의 중립적인 외교정책으로 후금은 조선을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죠.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후금과의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합니다. 이로 인해 후금 내부에서는 조선의 정책 변화를 보고 위협적으로 느끼게 되죠. 그 이유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자칫 명나라와의 전쟁 중 조선이 후방을 노린다면 매우 위협이 되기 때문인데요. 1627년 3월 1일 후금의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 정권을 벌준다는 명분 삼아 3만의 군대를 일으켜 침공합니다.
당시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북방 방어선이 매우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의주성, 정주성, 안주성, 평양성 등을 점령합니다. 이에 인조를 포함한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고 국토가 유린되자 어쩔수 없이 화친을 맺게 되는데요. 사실상 굴욕적인 항복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죠. 양국은 형제국으로 화약을 맺고 정묘호란은 끝이 납니다. 당시 후금은 내부적으로 사정이 복잡하였는데, 홍타이지가 누르하치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4명의 버일러와 알력이 존재했고, 명나라와의 원숭환이 만리장성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기에 서둘러 조선과의 전쟁을 종료해야 했었죠.
병자호란
정묘호란이 일어난 지 약 10년 후 1636년 12월 8일 병자호란이 발발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배경은 여러 복합적인 사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절대 권력을 곤고히 하였고, 주변 부족들을 완전히 복속시켜 황제로 즉위하게 되는데요. 국호를 대청으로 선언합니다.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리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게 군대 파병과 물자 지원을 요구하죠. 조선의 입장에서는 매우 굴욕적인 요구였습니다.
조선은 단칼에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하고 전쟁 준비에 돌입하게 되죠. 이를 알게된 청 태종 홍타이지는 즉시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군을 조직합니다. 1636년 12월 28일 청 태종이 이끄는 약 10만의 군대는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였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개성을 통과합니다. 조선은 청 태종의 군대가 예상외로 빠른 진격에 당황하였고, 인조는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어 남한 산성으로 긴급히 대피하였습니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게 되죠.
청나라 포로가 된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1612년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인조)과 청성현부인(인열왕후) 한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조반정으로 아버지가 국왕에 즉위하면서 왕세자에 책봉되었는데요. 정묘호란 발발 후 전주로 피신해 강석기의 딸과 혼인을 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갔으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그리고 부인인 강 씨가 피난 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남한산성에서 버티는 인조가 결국 항복하게 되죠. 병자호란의 패배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세자빈 강 씨 등의 왕족과 척화파 대신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청나라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시작한 소현세자는 초기 상당한 고초를 겪게 되는데요. 인질로 잡혀왔기에 늘 철저하게 감시를 당했고, 청과 조선의 관계가 나빠진다면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기에 불안한 생활을 해야 했죠. 그렇지만 소현세자는 포기를 하지 않고 심양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청나라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는 홍타이지를 알현하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단순히 만주어를 사용하는 역관이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심양은 다민족 국가체계를 확립하고, 특히 한족 문관들이 핵심 관료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명나라를 정벌하고 한족을 다스리기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죠.
홍타이지와 한족 문관들은 한어로 대화를 하자 제대로 한어를 사용하는 역관이 없어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에 소현세자는 약이 올랐는지 한어와 만주어를 모두 능통한 역관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소현세자를 도와준 이가 장현이라고 알려져 있죠. 청나라 생활이 힘들었으나 점차 적응해 고관들과 접촉해 친분들 쌓았는데, 그중 동갑이었던 도르곤과 친해져 많은 도움을 얻었다고 합니다. 틈틈히 고급 정보를 얻게 되면 조선으로 알려줘 대비하게 만들기도 했죠.
청나라 생활을 하던 중 청과 조선에서 생활비를 보태주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비가 점차 부족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청나라에서 일부 땅을 내주며 생활비를 완전히 끊어버리죠. 조선에서 보내지는 생활비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청나라에서 받은 땅에서 조선의 뛰어난 농사 기술로 우수한 곡식과 채소를 생산하게 되는데요. 이를 통해 상당한 비용을 벌게 되었고, 이 비용을 활용해 노예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조선인들을 구출해 농장에서 일을 하도록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둡니다. 일설에는 이 농장 경영은 소현세자보다 세자빈 강 씨가 적극적으로 운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청나라 관료들과의 교류에 사용되어 친분을 쌓는 게 큰 도움이 됩니다.
때로 청나라 측에서 소현세자에게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에 대해 따져 묻기도 하여 곤란함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능숙하게 조선의 상황을 재치있게 잘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경한 답변으로 일국의 세자로서 청나라 관료에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등의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강경한 답변은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관계를 기반으로 이미 제후국 반열에 오른 조선을 청나라 측에서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죠. 즉, 명나라 진출이 눈앞에 와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세자를 죽인다면 반청 감정이 커져 청나라 측에서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당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국 그리고 인조와의 갈등 그리고 죽음
이렇게 청나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소현세자는 도르곤 등의 도움으로 오랜 기간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는데요.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점령하면서 중원을 제패하게 되었고, 더이상 조선을 경계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인조는 아들이 조선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뻤지만 한편으로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해 세자로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경쟁의식이 생겨난 것이죠.
인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침입을 막지 못한 실책을 저지른 왕으로 특히,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겪어 권위가 바닥을 쳤습니다. 또한, 수많은 포로들이 심양으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를 막지 못하고, 오로지 복수에만 매달려 있던 상황이었죠. 말 그대로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급급했던 것인데요. 소현 세자 역시 인조처럼 반청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나 젊은 시절 심양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1645년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조선으로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9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와 세손들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이나 축하 연회, 치하 등을 받지 못하고, 귀국 3달 만에 학질로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죠. 당시 조선은 농경 국가로서 시장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둔전을 하고 무역을 했다는 사실을 인조가 매우 불편해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세자가 청나라 신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실을 복수귀가 된 인조와 대신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매국 행위로 본 것이죠.
조선왕조실록 인조 46권, 인조 23년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며, 인조가 이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1645년 4월 26일 갑자기 죽게 되었는데요. 일부 역사학자들은 인조나 소용 조 씨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바로 올빼미죠. 반면, 아직까지 모든 부분이 해석되지 않았으나 승정원일기에 실린 진료기록을 보면 단순 병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소현세자가 겨울에 귀국길에 오르며 얻은 병이 귀국 직후까지 낫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죠. 온몸이 검은빛이었다는 것은 청색증이 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사망하기 전에 기침 증상을 앓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순 감기가 아닌 폐렴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죠.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견테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세자빈 강씨와 원손의 죽음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자 인조는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이는 종법 질서에 맞지 않아 신하들의 발발이 있었으나 인조는 이런 반발을 왕의 권위로 모두 누르고 본인의 뜻을 관철하죠. 문제는 봉림대군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통성을 있어받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였는데요. 인조는 아주 비정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바로 강빈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게 되면서 소현세자의 적자들의 정통성을 없애버린 것이죠.
이때 강빈의 죄를 만들어 내기 위해 후궁 소용 조 씨를 저주했다는 죄목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강빈을 모시던 궁녀들이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죄를 고문을 하였습니다. 결국 국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저주하고,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죄목으로 폐서인이 된 강빈은 사가로 쫓겨나 사약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강빈의 집안은 몰락합니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은 죄인의 아들이 되었는데요. 장남 이석철과 차남 이석린, 삼남 이석견은 모두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당시 제주도에서는 돌림병이 창궐하고 있어 장남과 차남은 모두 열세 살과 아홉 살에 병사합니다. 또한, 삼남은 유배생활을 하다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습니다. 소현세자 일가는 아버지 인조에 의해 비참한 결말을 당하게 됩니다. 소현세자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남 경선군 이석철 | 첫째와 둘째 어린시절 요절 | |
소현세자, 강빈(세자빈 강씨) | 차남 경완군 이석린 | 경숙군주 |
삼남 경안군 이석견 사남 어린 시절 요절 |
경녕군주 경녕군주 |
평가
심양에서 오랜 기간 인질 생활을 했던 소현세자는 조선인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외교적 현알에서 조선의 입장을 잘 대변하며,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하죠. 또한, 성리학적 가치에 회의를 느끼고 계명군주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기록에서는 소현세자의 이미지가 과장이나 허구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청나라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지병을 달고 사는 허약한 체질을 가졌던 인물로 세자로서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했으나 기존 질서에 대한 반감을 딱히 드러낸 적 없는 수동적인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한 것이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인조의 국정 능력보다는 소현세자의 능력이 더 뛰어났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의 미래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죠. 다만, 소현세자가 개인적 역량이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봉림대군 즉 효종 이상의 실적을 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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