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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난동 사건 실화 영화, 줄거리 및 결말

알풀레드 2020. 11. 30.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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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실미도(현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들은 1968년 5월 실미도에 입소하여 지옥과 같은 훈련을 하면서 약속된 보상을 기다렸는데요. 믿었던 보상은 백지화되고 목숨까지 위협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자 생존을 위해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청와대로 돌진할 계획을 세웁니다. 



<부대 소대장 김방일씨가 공개한 실미도 부대원들의 사진>



   실미도 난동 사건 이후 정부는 실미도 부대를 철저히 은폐하였고, 긴 세월속에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실미도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쏟아졌고, 마침 실미도를 다룬 소설과 영화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특히 영화 '실미도'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영화 실미도>



   2004년 정부는 공식적으로 진실 규명에 착수하였고, 국방부는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에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 2006년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실미도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북한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응하여 북한 침투 작전을 하기 위해 창설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주도로 공군이 민간인 31명을 특수목적으로 고용하였고... 훈련은 그야말로 비인간적이고... 가혹행위와 폭력으로 통제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생존을 위해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죠. 





   청와대로 진입하려던 실미도 북파공작원들은 서울 대방동 삼거리에서 멈춰섰습니다. 인천 시내버스와 바리케이드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공작원 20명이 즉사... 생존한 공작원 4명은 모두 사형 당한 후 암매장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이들은 특수 범죄자 혹은 무장공비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역사 속에서 묻혔습니다. 





   영화 실미도의 내용을 따라 좀더 자세히 당시 사건에 대해 살펴볼까요? 1960년대 후반 남북 갈등은 최고조에 있었습니다. 북한은 남한을 적화 통일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하였고... 급기야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부대를 남파하게 되는데요. 31명의 게릴라 부대는 청와대를 급습하려다 실패하였고... 유일하게 생존한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국민 여론 역시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복수할 계획을 세웠고... 미국은 그런 박정희 대통령을 만류하였는데요. 이에 굴하지 않고... 전국 군/검/경/중앙정보부/여당 등 주요 핵심 인사들을 모아 긴급합동안보비상회의를 개최한 후 대북응징보복 방침을 수립합니다. 





   우선 대북 대응 태세가 강화되었고... 간첩 억제를 위한 다양한 정책이 도입... 이와 함께 극비리에 "실미도 부대" 창설 계획을 진행합니다. 당시 최고 권력 기관인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공군에 김신조 부대를 뛰어넘는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하였습니다. 공군에 명령을 한 이유로는 고공 침투 작전을 염두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중정의 지휘 아래 공군은 우선적으로 사형수 중심의 공작원 선발을 실시합니다. 그 이유는 사형수를 훈련시킨 후 작전에 실패하더라도 뒤탈이 없기 때문이죠. 이는 영화의 내용과 흡사합니다. 다만 공작원을 사형수 중심으로 꾸리려고 한 계획은 실패하게 되는데요. 





   법무부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절합니다.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게 되면 시신을 유가족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작전에 실패할 경우 시신 인도 의무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죠. 





   결국 공군은 무연고자나 가족과 연락이 끊긴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작원을 모집합니다. 즉 영화와는 달리 가난하고 힘없는 일반 청년들이 작전에 성공하면 막대한 보상을 준다는 말에 속아 지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공군은 31명의 공작원을 데리고 훈련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1968년 4월... 실미도 부대 창설하였는데... 본래 '209파견대'가 공식 명칭이었지만... 창설일인 '684' 부대라는 용어로 불렸습니다. 입교식 선서 후 임시 군번을 받았고... 북한 침투 후 김일성 북한 주석 등을 폭파하는 임무를 받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훈련이 이어집니다. 





   1968년 5월... 실미도에 입소한 공작원들은 "인간병기"로 조련하기 위해 매일 지옥 훈련을 하는데... 문제는 이 훈련이 실전보다 더욱더 빡셨다는 점인데요. 산악 구보, 장애물 넘기, 외줄 타기, 해상 침투, 위장 등의 훈련과 함께 기간병들이 실제 기관총으로 위협 사격을 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실제 공작원들이 총에 맞거나 외줄 타기를 하다가 추락해 심하게 다쳤다고 하네요. 영화에도 잘 표현이 됩니다. 





   훈련을 빙자한 가혹행위와 폭력도 계속해서 발생했습니다. 성적이 저조한 공작원은 군홧발로 짓밟히고... 몽둥이로 맞고... 이로 인해 많은 공작원들이 골병이 들었다고 하네요. 말그대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기간병들 역시 공작원들이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다면 구타를 당했기 때문에... 더 악작같이 공작원들을 훈련시키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받은 실미도 공작원들... 오전 4시 30분부터 구보, PT체조... 줄타기, 산악행군... 정신무장이나 북한 위장 행동 요령... 등 수많은 훈련을 받고 살인 기계가 되어가는 공작원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져 갑니다. 





   본래 약속한 월급은 거의 받지 못하고... 급식이나 보급품이 점점 줄었다고 하는데요. 이로 인해 공작원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교육대장은 인내력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라고 하면서 방치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작원들의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김신조 부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었고... 오랜 훈련의 성과를 만들기 위해 북한으로 침투하는 날이 다가옵니다. 





   문제는 당시 남북관계가 냉전에서... 화해의 분위기로 바뀌었고... 또한 미국 역시 이런 이상 분위기를 감지하고 작전을 막았다고 합니다. 결국 북한 침투 작전은 전면 취소가 되었고... 공작원들에 대한 처우는 계속해서 나빠졌습니다. 





   684 부대의 예산이 끊기게 되자... 봉급은 완전히 끊기고... 음식은 더욱더 부실해지고... 특히 기간병들이 대거 교체됨에 따라 공작원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요. 이 가운데 684부대를 정리한다는 이야기가 공작원들에게 알려지면서 생존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짓자며 탈영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에 앞서 영화의 내용처럼... 훈련을 받다가 죽는 대원도 늘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라는 마음으로 일부 부대원이 탈영하여 주민들을 사로잡고 성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즉결 처형을 받았죠.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공군 교관과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완전 무장을 한 채 인천에 상륙하였습니다. 이들은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부평, 소사,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돌격하려고 하지만...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일원에서 진압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수류탄으로 자폭을 합니다. 이들 중 4명은 죽지 않고 체포되어 군법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되었고... 장례절차 없이 암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정부는 처음 무장공비라고 발표하였다가... 하루만에 군 특수범으로 정정하였고... 정부는 이 실미도에 대한 존재를 철저히 은폐하였습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영화 실미도와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다만 사형수가 아닌 일반 서민이었다는 점은 다르죠. 이상으로 실미도 난동 사건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출처. 영화 실미도, 실미도 나무위키, 포털 뉴스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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