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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제주 4.3 사건부터 여순사건까지 돌아보기!

알풀레드 2020. 4. 3.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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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수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지나 남북간의 이념대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요. 그중에서 제주 4.3 사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제주 4.3 사건에 대해 많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루었습니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아픔의 역사 그 자체이며...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다크투어리즘에 제주 4.3 사건을 연계하여 관광객들과 아픔을 함께하고 있기도 하죠.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라고 함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 또는 수형자를 의미하고, 유족이란 희생자의 배우자와 직계존속을 말합니다(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로서 태평양전쟁 말기 미국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외지로 나가있던 제주도민들이 입도하면서 혼란을 겪었는데요. 당시 생필품 부족, 콜레라 발병, 식량난 등의 문제로 민심이 악화되었고... 특히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은 미군정하에 다시 치안 책임을 맡으면서 제주도는 무법지대가 되었다고 해요.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경찰, 서청에 대한 탄압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당한 사건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모든 국민이 고대하던 광복의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광복의 그날에 우리는 독립 만세를 외치는 순간... 북쪽으로 소련이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을 한반도 남쪽으로 파견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나고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독립을 두고 갈등을 겪기 시작하고... 이에 대한민국은 독립을 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유학 출신의 이승만 박사는 정읍 발언을 합니다. 즉 통일정부는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발언은 당시 민족지도자들(좌익, 우익, 중도파까지)의 반대가 빗발치기 시작했고... 한반도의 갈등이 이어지자 미국은 소련과 UN의 의견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합니다. 이에 UN은 1947년 11월 14일 UN 감독하에 '남북한 총선거'... 즉 인구비례 선거를 하라고 명령하는데요.



   문제는 '남북한 인구비례 국회의원 선거'를 진행한다면 당시 남한의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의석 수가 남한이 많이 차지할 것을 안 소련은 이 방식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소련의 반대로 인해 결국 38선 이남에서만 유엔 감시하에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이에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따라 남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된다면 우리나라가 반으로 쪼개지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데요. UN의 결정에 따를 수 없다며... 나서신 분이 있는데... 바로 김구 선생님입니다. 김구 선생은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3.8선을 넘어 북한의 지도자들과 만나 이념을 넘어 UN의 결정에 대해 다시한번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죠. 



   민족지도자들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하고 우리민족은 하나이지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물러가게 하기로 협의를 하지만... 당시 남한에서는 단독 선거가 차근히 준비가 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김구 선생은 5.10 선거에 불참을 선언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남한 200개 선거구 투표가 진행되었고... 제주도는 총 3개의 선거구를 배정받았는데... 2개의 선거구가 불에 타서 초대 국회의원은 200명이 아닌 198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제주도는 사회주의자의 섬! 빨간 섬으로 낙인이 되었습니다. 



   과연 제주도 2개의 선거구가 불타게 된 배경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과거 제주 유배인물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은 바로 광해군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역시 제주도에 유배된 적이 있으며... 조선시대 약 200여 명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고 해요. 즉 조선시대 가혹한 진상과 부역으로 고통을 받은 곳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일제 강점기가 되었을 때 일본과 가까운 제주도는 징용과 징병의 인적 수탈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는 군사 기지화 시키기도 하였는데요. 당시 제주도민은 너무 힘든 환경에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독립이 되었지만...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났지만... 제주도에는 여전히 일본군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고립된 섬에서 만세를 부르고 싶었던 제주도민들은 일본 경찰이 총칼로 위협을 하고 있었고... 당시 총칼로 마지막까지 제주도민의 횡포와 수탈을 해갔다고 하네요. 



   제주도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물러나고...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친일파, 친일파 경찰을 처단해줄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고 하는데... 



   당시 미군정은 전국 남한의 친일파 경찰과 공무원을 그대로 등용합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더이상 일본은 자신들의 적이 아니며... 소련이 새로운 적이 되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하루빨리 안정시켜 밀고내려오는 소련을 견제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죠. 이에 한반도는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충격적이게도 당시 1946년 말 군정경찰 간부의 82%는 친일파 출신이라고 해요. 뿐만아니라 1946년 8월 전라도 부속의 제주도를 경상도와 전라도와 같은 급의 도로 승격을 시킵니다. 이로 인해 제주도는 전라도에서 지원받던 물자가 끊기게 되고... 더불어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게 되는데... 제주도의 상황은 점차 매우 심각한 상황이 도래하게 되죠.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제주도가 승격된 후 외부에 있던 6만 여명의 사람이 제주도로 들어오게 되면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여러가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강점기에 101명이었던 경찰이... 1947년 2월 330명으로 증원됩니다. 증원되는 경찰은 응원경찰이라고 불렀는데... 제주도에 있는 경찰을 응원해주기 위해 오는 외지 경찰은 응원 경찰이라고 했는데... 이들 역시 친일파 출신이었다고 해요. 결국 친일파에 의해 어려움을 겪던 제주도민은 미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3.1발포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3.1 운동 2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군중들은 관덕정에서 평화 가두시위를 진행하였는데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자 위협을 느낀 경찰은 육지에서 응원 경찰 100여 명을 더 보내달라고 지원 요청을 합니다. 


  

   만세 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 기마경찰이 지나가다가 갑작스럽게 나온 6살난 어린이가 말의 발굽에 채였는데... 경찰은 이를 모르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도민들은 해당 경찰에 분노하여 그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였고... 군중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는데요. 



    그 모습을 본 경찰들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착각하고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합니다. 이때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안타깝게도 구경을 나온 국민학교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아낙네가 사망하게 됩니다.  



   도민들은 분노하였고... 경찰서를 찾아가 진상규명과 발포 경찰 책임규명을 하여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는데요. 이때 경찰은 제주도민을 향해 기관총을 설치한 후 당장이라도 발포할 태세를 취하게 됩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제주신보 기자들은 상황을 중재하여 급하게 상황이 마무리가 되는가 싶었는데... 참을 수 없었던 도민들은 9일 후 3.10 총파업에 돌입합니다. 당시 제주도 내 관공서, 통신기관, 기업인, 자영업자, 학교, 경찰 등 166개의 단체, 41,211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었다고 해요. 



   제주도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앙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 공무원에게 제주도민들은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합니다. 경찰이 어린아이를 치고... 여성에게 총을 발포한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라고 하는데... 사회주의를 들먹이며... 협박을 했다고 하는데... 이들의 후손이 지금... 아우.. 이번 총선 때 투표를 정말 잘해야할 듯 하네요. 



   이때부터 수많은 응원 경찰이 제주도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또한 서북청년회가 입도하게 됩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평남, 함북, 황해청년회 등 이북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서울에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 집단입니다. 



   제주도 경찰들이 파업을 한 자리를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채우기 시작하고...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하는데요. 1948년 4월 3일 운명의 제주 4.3사건이 발발합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시립 촉구 등의 슬로건을 걸고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사건이 바로 제주 4.3사건입니다. 



   제주 4.3사건을 일으킨 무장대의 약 350여 명은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일제히 습격하였습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하였는데요. 당시 경찰과 우익인사 12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때 정부는 조선경비대 제9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려는 시도를 하였는데요. 당시 제9연대장 김익렬은 제주도 내에 있는 경찰과 주민들 사이 마찰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므로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고 말했습니다. 



   이에 김익렬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만나 평화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로 하고... 서귀포시 구억리에서 만납니다. 무장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응원경찰을 철수시킨 후 무장대의 신변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는데요. 김익렬은 미군정 장관의 명령으로 이자리에 왔으니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약속하고 72시간 내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으로 대화로 해결할 것을 합의하는데요. 



   약속이 지켜졌다면... 더이상의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 협상을 결렬이 됩니다. 5월 1일 우익 청년 단원들에 의한 '제주읍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당시 미군정 장관이 제주도로 은밀이 방문하게 되는데... 조병옥 경무부장과 김익렬 연대장은 제주도사태 관련 회의를 하고...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되는 사태가 발생되죠.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 후 후임자로 박진경 연대장(ㄱㅅㄲ)이 부임을 하는데요. 박진경은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했답니다. 당시 박진경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부하들이 보다 못해 박진경을 향해 총을 쏘는 피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제주도는 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정부에 반기를 든 빨간 섬으로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당시 정부는 군대를 더 동원하여 토벌하려고 하였고... 



   이때 여수, 순천 사건이 발생합니다. 즉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되죠. 



   이때부터 군인 토벌대가 제주도민을 학살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삼진작전을 펼칩니다. 삼진작전은 좌익세력들을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앤다... 라는 의미라고 해요. 어떻게 자국민에게 이런... 참... 그리고 초토화 작전이 선포되죠.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4.3 희생자의 70~80%가 학살당했다고 알려졌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 선포... 1948년 12월 10일 비학동산 총살사건이 발생하는데... 얼마나 끔찍한 사건이었는지... 눈물이 납니다. 일제 강점기 때보다 더욱더 잔혹한 방법으로 국민을 학살하다니... 



   표선면 가시리 학살사건도 진상조사보고서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빌레못굴 학살 사건도 있는데... 일일이 열거하기가 너무 많아서 다 글을 적기가 힘드네요. 



   이런 제주4.3사건 발생 이후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사과를 기대했으나...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결국 이 사건을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암울한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사건이 공론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희생자와 유가족과 제주도민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현대사에는 다양한 아픔을 가진 사건들이 벌어졌지만... 그중 특히나 제주 4.3사건은 국민이 국민을 죽이는 가슴 아픈 역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설민석 민의 강의를 너무 재미있고... 한편으로 가슴시린 강의 너무 잘 들었어요. 



<출처. KBS 제주4.3 70주년 설민석의 역사특강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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