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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을 사랑한 인현왕후와 희빈장씨... 장희빈은 정말 악녀였을까?

알풀레드 2019. 4. 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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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역사 인물들 중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또한 조선시대 최고의 악녀라고 하며 누가 떠오르나요? 바로 숙종 임금의 후궁인 희빈 장씨... 즉 장희빈입니다. 왜 우리는 장희빈이 악녀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고... 반면 인현왕후를 떠올리면 자애롭고 인자한 중전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 두사람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할까요?.. 




   먼저 장희빈에 대해 알아볼께요!! 장희빈은 궁녀 출신으로 중전의 자리에까지 오른 여성입니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당파 싸움 속에서 질투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숙종의 마음을 쥐고 흔든 희대의 요부라는 이미지가 박혀있는 여인입니다. 




   사사되는 최후의 순간에도 숙종에게 악담을 퍼부은 조선 최고의 악녀 장희빈... 숙종을 둘러싼 궁중 암투극 그 중심에 있던 장희빈의 파란만장한 삶... 왜 그녀는 악녀가 되었을까요?




   인단 정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국중의 거부로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 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장희빈의 미모가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사극에서는 장희빈 역할을 맡은 배우는 대부분 미모의 여배우가 캐스팅되었는데요. 조선시대 대표 미녀인 어우동, 황진이 등은 역사적으로 미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반면 장희빈은 정사 기록에 미모로 남아있다는 점은 조선시대 대표 미녀로 볼 수가 있죠.




   장희빈... 본명은 장옥정인데요.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사역원 정9품 봉사로 재직하였고...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역관으로 최고 관직이 정3품까지 오른 인물로 알려져있습니다. 즉 일설에 알려진 어미가 노비라는 사실은 '카더라' 정도 받아들이고 있죠. 




   또한 장희빈이 입궁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보통 사극에서 보여주듯이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잃은 남인이 미인계로 장씨를 입궁시켰다고 하지만 당시 장씨의 나이가 22세였기 때문에 이 부분은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하네요. 최근 장희빈의 입궁에 대해서는 당숙 장현의 추천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경신년에 숙종의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숙종의 승은을 입은 시기를 168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1681년 숙종은 인현왕후와 국혼을 올리고 남인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로 인해 경신환국이 발생... 장희빈은 궁에서 쫒겨 납니다. 




   이후 장희빈을 쫒아냈던 명성왕후가 죽고...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궁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였는데요. 보통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장옥정이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장희빈이 궁을 나온 시점에 당백부 장현은 유배에서 풀려나와 재물을 모우고 장희재는 무과에 급제하는 등 유복한 생활을 하고 이 과정에서 남인들과 정치적 결탁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옥정이 궁으로 다시 입궁한 후... 1686년 12월 10일 장옥정은 내명부 종4품 숙원에 책봉됩니다. 그리고 2년 후 장씨는 고대하던 왕자를 생산하였는데요. 당시 숙종의 첫 아들이며... 훗날 경종으로 즉위하는 이윤입니다. 




   장희빈이 왕자를 생산한 시점에 한가지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바로 옥교 사건으로 장옥정의 친정 어머니가 딸의 산후조리를 해주기 위해 궁궐로 들어오는 길에 옥교(가마)를 타고 왔는데... 당시 옥교는 정3품 이상 관리의 어미나 부인이 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법이었으나... 당시 돈좀있고 힘좀 있는 사람들은 잘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인들이 이를 트집 잡아 옥교를 빼앗게 되는데... 




   우리의 상남자 숙종은 이 사건을 두고 관리를 파직하고 죽이기까지 했답니다. 이에 왕을 견제하는 기관인 홍문관, 사간원까지 상소하고 난리가 나면서 숙종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데요. 이때 숙종은 자신의 뜻을 거스린 서인들을 제거할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곧바로 왕자의 명호를 정하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당시 중전인 인현왕후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앞으로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서인들은 반대를 합니다. 오죽하면 일부 남인들도 반대하였다고 하는데요. 숙종은 이미 자신의 뜻을 반하는 서인들을 제거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물리치고 왕자의 명호를 정하고 장옥정을 장희빈으로 삼았습니다. 




    이때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이러한 명을 거두라고 상소를 올립니다. 이부분은 서인들의 판단 미스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미 결정이 난 일을 왕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밖에 보일 수 없는 것이죠. 결국 이일을 빌미로 그 유명한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인현왕후는 폐서인이 되어 궁 밖으로 내처졌습니다. 




   이 기사환국 과정에서 중전에 오른 장희빈... 하지만 숙종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서인을 비롯하여 종친들까지 혹독하게 고문을 가하며 죽였는데요. 이들의 원한은 장희빈에게 쏟아질 수 밖에 없었겠죠.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장희빈이 공작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영향을 미쳤을 지언정... 여인의 힘으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합니다. 




   즉 숙종이 벼루고 있다가 칼을 뽑은 것으로 볼 수 있죠. 당시 피해를 받았던 서인들과 종친들은 숙종을 원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원한들이 모두 장희빈에게 쏟아지면서 악녀의 이미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이후 계속해서 복위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대중들의 인식속에는 인현왕후를 폐서인 시킨 것을 후회하는 사이 장희빈의 거친 성격에 회의감이 들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고 알려져있는데요. 




   면밀히 이 부분을 분석해보면... 서인들을 제거한 후 정권을 잡은 남인들의 세력이 점처 커지면서 왕권을 위협할 정도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차에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남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갑술환국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또한 인현왕후가 복위된 날 중궁전이 아닌 서궁으로 보냈다는 점은 복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쨋든 결론은 다시 인현왕후가 중전에 오르고... 지위가 강등당한 장희빈은 울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숙종과 인현왕후에게 문안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중전이 되기 위해 '민씨'라고 부르며 저주하였고... 그러다 인현왕후가 죽음을 맞이했다라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장희재를 처형하기 위한 명분이 된 일이고... 실제로 장희빈이 이러한 일을 벌이기는 힘들었다고 하네요. 




   일단 숙종이라는 사람이 민간에 알려진 것처럼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의견을 펴지 못한 유약한 왕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여인들을 이용하여 환국정치를 벌일 만큼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왕으로 매우 냉혹한 성격을 가진 숙종에게 장희빈이 자신의 아들이 문제가 생길만한 일을 하였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죠. 




   인현왕후가 죽은 후 서인들은 남인이 다시 재집권할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장희빈이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또 다시 피비린내나는 환국 정치가 시작될 것이니깐요. 이에 노론은 숙빈 최씨를 이용하여 무고의 옥 사건을 일으키는데요. 취선당의 신당과 인현왕후를 저주를 고변하여 결국 장희빈은 사약을 먹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사에는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을 저주하였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실제로 장희빈이 신당을 차린 것은 세자의 안위를 염려하여 차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죠. 하지만 인현왕후가 죽음을 맞이한 시기와 맞물려 정치적인 개입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사기록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패악을 부려서 강제로 먹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하네요. 세자를 위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며... 세자의 고환을 상하게 하면서 최악의 악녀로 불리게 되었으나... 이 부분도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죽은 후 명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세자뿐이고.. 또한 당시 중전의 죽음으로 빈소를 지켜야했기 때문에 장희빈을 찾아올 수 없었다고 하죠.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장희빈이 악녀의 이미지를 얻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 이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는 과정에서 숙종에게 화풀이 할 수 없는 서인들이 악녀의 이미지를 씌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선악의 대결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장희빈의 출신의 한계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도 보입니다. 흙수저는 아니지만 은수저로서 태생적 한계를 보이고 있는데요. 만약 장희빈이 후궁이었다고 하더라도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과연? 이렇게 비참한 몰락을 하게 되었을까요? 악녀의 이미지까지는 얻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집권층들의 시각에서 보면 은수저인 장희빈이 자신의 힘으로 동등한 권리를 얻은 그녀를 좋은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숙종에 의해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를 포스팅해보았는데요. 이런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가 있는 것 같네요.^.^. 아래그림은 현대 풍으로 장희빈의 실제 얼굴 모습을 재현한 그림인데... 정말 현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참 예쁜 것 같죠?ㅎㅎ



<출처. 영웅 삼국지, 나무위키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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