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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등장인물:) 현종의 몽진을 지킨 수호신 지채문

알풀레드 2023. 11. 23.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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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야심 차게 준비한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국 시청률은 4회 기준 7%를 기록하고 있어 아직까지 무난한 출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넷플릭스 국내 1위를 차지할 만큼 좋은 흥행률과 MBC 경쟁작 연인이 종영됨에 따라 더욱더 시청률이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거란전쟁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고려의 영웅들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현종의 몽진을 지킨 수호신 지채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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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사: 열전에 등장하고 있는 지채문은 봉주 사람으로 현종 원년인 1010년에 중랑장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중랑장에 임명되기 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죠. 2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하자 현종은 지채문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화주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화주에 진을 치고 동북면을 방어하고 있었는데요. 강조가 이끄는 대군이 통주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서경이 위험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현종은 다시 서경 방어를 위해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당시 거란은 강조의 대군을 대파한 후 서경으로 진격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습니다. 이에 서경부유수 원종석은 항복을 결정하였는데요. 지채문이 서경에 도착하자 서경의 배신자 무리는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서경 내부에는 결사 항쟁을 준비하던 소수의 세력이 남아있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서경으로 진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경 유수 원종석 등은 항복을 고수하게 되는데요. 결국 지채문은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바로 거란의 사절단을 암살해 버린 것입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사절단이 암살당함에 따라 항복할 길이 막혀버렸는데, 얼마후 동북계 도순검사 탁사정이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도착하자 안정을 되찾고 거란에 대항하기로 결정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죠.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시간을 끌기 위해 거란에 항복 사절을 보냈고, 거란의 성종은 이를 믿고 서경을 점령하기 위한 병력을 보냅니다. 지채문과 탁사정은 거란 기병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요. 이후 재차 거란군의 공격으로 패주 하게 됩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현종의 몽진... 호위무사 지채문...

 

지채문은 수도 개경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항복론이 대두되고 있었는데요. 훗날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이 몽진을 주장하였고, 현종은 강감찬의 의견을 받아들여 몽진(*)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지채문은 스스로 현종을 호위하겠다고 자진하였는데요. 현종은 이에 감명받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는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특히 강조의 정변으로 국왕에 오른 현종으로서는 궁궐을 나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도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고, 이를 극복한 현종은 현명한 군주로서 경험치를 쌓게 됩니다.

 

(*) 몽진의 뜻은 머리에 먼지를 뒤짚어 쓴다는 의미로, 임금이 난리를 피해 궁궐 밖을 나간다는 뜻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현종은 금군 50명과 왕후와 후궁, 채충순 등과 몽진하게 되는데요. 적성현(현재 파주시) 단조역에 도착하자 무장한 견영이 단조역의 사람들과 함께 활을 겨누며 일행에게 덤벼들었다고 하는데요. 지채문이 말을 달려 활을 쏘면서 그들의 변란을 진압합니다. 이번에는 창화현(양주군)에 당도하자 어떤 향리가 "왕은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느냐?" 며 무례한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요. 현종이 이를 무시하자 향리는 하공진이 온다며 소란을 떨자 현종의 일행이 왕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정체 모를 적들이 습격을 하면서, 현종의 목숨이 또 한 번 위험에 처하죠. 이번에도 지채문이 현종을 호위해 탈출합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무사히 탈출한 후 지채문은 하공진이 나타났다는 말은 거짓임을 눈치채고, 현종에게 창화현으로 정찰을 나가겠다고 말하는데요. 현종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신하들을 본 후라 지채문이 자신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지채문은 "소신이 임금을 저버린다면 하늘이 결단코 소신에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라며 허락을 받아내죠. 그리고 하공진의 결백을 확인한 후 그의 병력과 잃어버린 말과 안정을 찾은 후 다시 남쪽으로 몽진합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이때 현종을 따르던 류종과 김응인은 임신한 두 왕후와 함께 간다면 몽진길이 늦어져 고향으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하는데요. 이때 지채문은 두 왕후를 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현종 일행이 사산현에 이르렀을 때 지채문은 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에 활을 쏘아 맞힌 후 잡은 기러기를 현종에게 바치면서 이렇게 활을 잘 쏘는 신하가 있으니 도적이 있은들 무슨 걱정이 있겠냐고 안심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현종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불만을 품자 이들을 포상해 달래줄 것을 건의하기도 하는데요. 목숨을 건 현종의 몽진을 호위해 무사히 나주에 도착합니다. 나주는 현종의 기반이 되는 곳이라 더이상의 위협이 없었죠. 

 

출처. 고려거란전쟁

 

지채문의 죽음.. 그리고 평가..

 

현종의 몽진을 호위했던 지채문은 1016년 우상시로 임명된 후 무직을 겸하게 됩니다. 그리고 1026년 상서우복야로 승진하였으나 같은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1031년 덕종은 현종의 남행을 호위한 공으로 1등 공신으로 추증하죠. 용맹과 충성으로 후대 길이 이름을 남겼습니다. 만약 몽진을 하던 중 현종이 목숨을 잃었다면 고려 조정은 혼란에 휩싸이고 최악의 경우 항복하여 멸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채문은 혼자서라도 목숨 걸고 현종을 호위해 국난을 극복하고, 훗날 강감찬이 귀주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바톤을 넘기게 되죠. 아쉬운 점은 대회전으로 승리를 거둔 강감찬에 비해 화려한 전공이 없는 지채문은 인지도가 떨어집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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