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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통주 전투(+요나라 성종, 야율융서, 강조)

알풀레드 2023. 10. 1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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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10년 요나라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를 요격하기 위해 강조는 고려의 30만 정예군을 이끌고 통주로 향합니다. 그리고 통주성 인근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인 결과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면서 고려에 크나큰 시련을 안겨준 전투로 현대인들에게 기억을 남기게 됩니다. 과연 통주 전투는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살펴볼까요?

 

출처.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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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강조의 정변으로 요나라 즉 거란의 성종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물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합니다. 요나라 거란군은 1010년 11월 중순 압록강을 도하하여 흥화진에 도착하는데요. 요나라 성종 야율융서는 흥화진은 가볍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하루빨리 개경으로 진군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규가 이끄는 흥화진의 군사 약 3,000여 명은 결사의 각오로 거란족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출처. doopedia.co.kr

 

서전

40만 대군이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대군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상황에 당면하자 요성종 야율융서는 20만 대군을 흥화진에 포진시킨 후 남하합니다. 남하한 거란군은 통주와 귀주로 병력을 나누어 이동하였고, 야율융서가 이끄는 본대는 통주로 향하는데요. 통주에는 정변을 일으킨 강조가 행영도통사로서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성종 야율융서는 통주에 당도한 순간 매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는데요. 당대 최강의 기병을 보유한 거란을 상대로 대회전을 할 준비를 했기 때문이죠. 

 

출처.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

 

삼수채 전투

11월 25일 강조는 통주성 서남쪽 창강의 지류 3개가 합쳐진 삼수채에 병력을 배치한 후 3개의 진지를 구축합니다. 강조가 통주성 인근에서 거란을 상대로 야전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란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적의 주력을 몇 달만 붙잡아놓고 있으면 보급 문제로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이죠. 특히 요성종 야율융서가 친정을 했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정치적인 문제도 함께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

 

이런 상황에서 강조는 비장의 무기인 검차를 전면에 내세우는데요. 보병들이 검차로 벽을 만들어 방어를 함에 따라 거란 기병은 함부로 정면돌파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강조의 고려군은 거란 기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고려군이 보유한 검차는 거란기병을 상대로 움직임을 제한하는 등 효과적으로 활용이 되는데요. 서전에서 거란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낸 강조는 점차 방심하기 시작합니다. 

 

출처.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강조가 검차를 일렬로 배치하여 두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곧 검차로 함께 공격하니, 모조리 물리치지 않음이 없었다. 거란군이 여러차례 물러나니, 강조는 마침내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 사람들과 탄기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해석해 보면 거란군은 검차의 위력을 본 후 기병 돌격 전술을 바꿔서 망구다이 전술과 같이 패배한 척한 후 방심한 틈에 일제히 검차를 피해 지휘부를 돌격하는 작전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

 

강조가 방심한 틈에 거란의 장수 야율분노와 야율적로는 삼수채에 주둔 중인 본군을 급습합니다. 당시 보초병은 강조에게 내습을 알렸으나 강조는 적군이 내부에 들어오면 격파하기 쉬우니 그대로 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쳐들어온 거란군에 의해 강조는 생포당하는 치욕을 겪게 되는데요. 고려사 양규 열전에 따르면 강조는 통주성 남쪽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요 지휘관들 역시 포로가 되거나, 전사함에 따라 3만의 고려군사들이 목이 베이고 수많은 군량과 병장기를 빼앗겼다고 합니다. 고려군으로서는 최악의 패배를 당하게 된 것이죠. 

 

출처.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

 

결과

통주 전투의 패배로 고려군은 수많은 병사들이 상하고, 군량과 병장기를 빼앗기게 됩니다. 거란군은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결사항전 끝에 통주성은 지켜내게 되지만 곽주가 함락됨에 따라 고려는 최악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서경까지 내려간 거란군에 의해 현종은 개경 방어를 포기하고, 나주까지 몽진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죠.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요성종 야율융서는 강조를 설득해 고려의 내분을 유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강조는 고려의 신하임을 내세우며 마지막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은 지키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출처. 고려거란전쟁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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