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리뷰☆★/고려거란전쟁:)

고려거란전쟁 등장인물:) 양규 장군(+실존인물, 죽음, 도순검사, 흥화진 전투)

알풀레드 2023. 10. 2. 13:56
반응형

1. 개요

2023년 11월 4일부터 KBS의 제34번째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방영될 예정입니다. 고려거란전쟁은 고려와 거란족의 요나라가 충돌한 여요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려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여요전쟁하면 기억나는 인물은 강감찬, 서희, 강조, 현종, 천추태후 등이 떠오르는데요. 강감찬 장군급의 임팩트를 보여주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양규 장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KBS 고려거란전쟁

반응형

 

우선,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역은 배우 지승현이 맡았습니다. 현재 공개된 티저 사진과 영상을 살펴보면 지승현은 묵직한 갑옷 차림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기대와 흥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실존 인물인 양규 장군의 어떻게 그려낼 지 궁금해지네요. 한편, 양규 장군은 2차 여요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였는데요. 무려 40만 대군의 거란군을 상대로 흥화진을 지켜내었고, 후방에서 거란군의 보급을 끊어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숨은 영웅입니다. 

 

출처. KBS 고려거란전쟁

 

2. 생애

1) 등장

양규의 고려사 열전을 살펴보면 거란 전쟁 이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즉 여요전쟁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활약을 했기에 고려사 열전에 기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전쟁 이전에는 하급 관리로 시작해 목종 시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승진하면서 형부낭중(정오품급 관리)이 되었습니다.  

 

출처. KBS 고려거란전쟁

 

2) 강조의 정변

양규가 형부낭중이 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승진을 한 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1009년 목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국정을 어지럽히자 서북면 도순검사였던 강조를 불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으나 강조는 정권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거란족 즉 요나라는 표면적으로 강조를 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인 침공을 합니다. 

출처. KBS 고려거란전쟁

 

3) 요나라의 침입과 전초전

1010년 11월 요나라 성종은 40만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침공하였는데요. 당시 양규는 서북면 도순검사(특별 임무를 주어 지방에 임시로 파견하던 관리)로 흥화진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흥화진을 지키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강조가 맡았던 도순검사 직위를 양규가 맡았다는 점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강조의 허락 없이 군사요충지였던 강동 6주를 관리할 수 있는 요직인 도순검사에 부임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죠.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흥화진 전투

 

그리고 1010년 11월 17일 요나라 성종이 이끄는 40만 대군은 양규가 지키고 있는 흥화진에 도착합니다. 흥화진에는 양규 이하 3,000명의 고려군 군사들이 요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당시 상황은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이었고, 수적으로 불가능한 전투인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양규과 고려군 군사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요나라 입장에서 손바닥만 한 흥화진은 쉽게 함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흥화진 전투

 

요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을 일주일 간 방어를 해냅니다. 양규와 고려군 군사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요. 요나라는 40만 대군을 끌고 왔기 때문에 보급 문제와 곧 겨울이 찾아오기 때문에 이 작은 성에 머무를 수만은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래서 성종은 사로잡은 고려 농민들을 보내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흥화진의 장수들은 항복 권유를 거절합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흥화진 전투

 

성종은 흥화진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유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20만 대군을 의주에 주둔시킨 후 남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합니다. 그리고 통주(현재 평안북도 선천군)에 주둔하고 있던 강조의 군대를 만나 격파합니다. 강조를 사로잡아 처형시킨 후 흥화진의 장수들에게 강조의 서신을 위조해 다시한번 항복을 권유하는데요. 양규는 "나는 왕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는다" 라며 또다시 거절합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흥화진 전투

 

4) 반격

요나라군은 남하하면서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근처 곽주성을 함락시킨 후 6,000의 수비군을 남겼습니다. 곽주성을 중간 기지로 삼아 보급을 용이하게 하려고 한 것이죠. 20만 대군은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혀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개경으로 발길을 돌렸는데요. 요나라 군대는 유목 민족으로 기동력이 좋기 때문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단숨에 개경까지 내려와 수도를 함락시킵니다. 이때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는데요. 이 부분은 현종 편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흥화진 전투

 

여요전쟁의 역전 스토리가 이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비록 요나라 황제 성종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개경을 함락시켰으나 중간 거점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상황이라 곤경에 처하기 시작하는데요. 양규가 방어하고 있는 흥화진에서는 여전히 요나라의 20만 대군이 포위를 하고 있었고, 양규는 70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요나라의 포위망을 뚫고 통주까지 진격하는 기적적인 작전을 수행합니다. 통주에서 1,000여 명의 군대를 수습한 후 요나라의 거점 기지로 활용되고 있는 곽주를 공격해 6,000명의 요나라 수비군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당시 양규가 어떤 작전을 통해 곽주를 탈환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곽주성에 있는 고려인들이 양규의 군대에 내응해 성을 열었고, 급습을 통해 승리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곽주성을 탈환한 전과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명량해전으로 승리하였을 때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 낸 전투로 평가받는데요. 만약 곽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면 고려라는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곽주를 근거지로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면 서경 역시 함락되었고, 고려 황제가 몽진한 길을 따라서 지속적으로 전쟁이 이어져 자칫하다가 포로로 잡혔을 최악의 상황까지 당면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양규는 고려 백성을 구해낸 후 그들로 하여금 통주성을 방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나라 군대를 향해 진격하면서, 흩어져 있던 고려군을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개경을 함락시킨 요나라 황제 성종은 상당히 애매한 상황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친정(황제가 몸서 나아가 정벌함)을 한 상황에서 부하장수들에게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어야 했는데, 고려 황제가 도망간 상황이 발생한 것이죠. 아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후방은 매우 어지럽고, 병사들은 지친 상황에서 되돌아가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군대의 습격으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고려는 성종에게 돌아갈 수 있는 명분을 주기 위해 화의를 청하는데요. 당시 고려 충신 하공진은 고려의 왕은 이미 남쪽 수천리 밖으로 피난간지 오래이기 때문에 추격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성종은 철군을 하는 선택을 하고, 전쟁에서 고려의 수만 명의 포로를 납치해 청천강까지 회군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중간 보급기지가 없이 돌아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는데요.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귀주에 주둔하고 있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은 거란군을 습격해 10,000명을 죽였습니다. 또한, 양규는 무로대를 습격해 2,000여 명의 거란군을 죽이고, 고려 백성 3,000여 명을 구출합니다. 이어 이수에서 석령까지 추격해 2,500여 명의 거란인을 죽이고, 고려인 1,000여 명을 구하였으며, 3일 뒤 여리참에서 1,000여 명을 사살하고, 고려인 1,000여 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정말 엄청난 활약이라고 할 수 있죠.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5) 최후의 결전

양규는 고려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격렬한 전투를 이어왔습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출전하여 1,000여 명의 거란군을 죽였습니다. 양규의 승전보가 울리는 순간 애전에 성종이 이끄는 요나라 거란군 본대가 나타나 포위를 하였는데요. 양규와 김숙흥 그리고 고려군대는 성종의 친위군을 맞이해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고 전해집니다. 성종의 친위대는 그야말로 최강의 부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대를 상대로 분전하여 상당한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은 애전 전투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산화하죠.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3) 평가

양규 장군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2차 여요전쟁으로 개경이 함락된 최악의 상황에서 거란군의 중간 보급기지였던 곽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대반전을 이끌어낸 영웅이라고 할 수 있죠. 또한, 거란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지원군 없이 약 1달 동안 7차례의 기습을 통해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고려백성 약 30,000명을 구출하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또한, 수많은 군마와 낙타, 병장기 등을 노획하였는데요. 이는 후에 벌어질 3차 여요전쟁을 대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양규 사후 고려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공부상서로 추증하고,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 섬을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양대춘에게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고 전해지죠. 그리고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고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하였는데요. 이 공신호는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인만큼 건국공신에 준하는 예우를 해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양규는 고려사 무장들 가운데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최고의 특수전 사령관이자 야전 지휘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흥화진 전투에서 보여준 수성전 역시 군대를 통솔하고, 지휘하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죠. 다만, 그 기간이 짧고 전사함에 따라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편입니다. 이에 고려거란전쟁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활약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면 좋겠네요.  

 

출처. JTBC 평화전쟁1019

반응형
그리드형(광고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