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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강감찬 장군과 귀주대첩(+현종, 소배압)

알풀레드 2023. 11. 2.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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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즉 여요전쟁의 대미를 장식할 귀주대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곧 방영될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귀주대첩을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고려사에서 거란과의 전쟁은 국가가 멸망할 수 있었으나 국왕과 국민들의 피땀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귀주에서 수만 명의 거란인의 목숨을 거두는 통쾌한 반전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는지 살펴볼까요? 

 

출처. 고려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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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중국 당나라 말기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 유목 민족이었던 거란이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대통합하고, 인근 해족, 실위, 서하, 하서회골 등을 정복한 후 만주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와 국경을 맞닿게 된 거란은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는데요.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무도한 국가라고 하여 국교를 단결합니다. 

 

출처. 고려거란전쟁

 

거란은 송나라를 제압하고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후방의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발해를 멸망시켰으나 그 잔존 세력들이 후방을 위협했고, 특히 고려로 흡수되고 있었기에 큰 위협이 된 것이죠. 반면, 고려는 발해의 잔존세력을 흡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는다면 발해 세력을 포용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기 때문에 그들을 배척한 것인데요. 양국은 서로의 이해관계 속에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출처. 평화전쟁 1019

 

1차 고려거란전쟁

 

요나라 소손녕의 대군이 침공함에 따라 고려 조정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특히 소손녕은 봉산군에서 윤서안이 이끄는 고려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봉산을 점령한 후 고려 조정에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속히 항복하라고 협박을 하는데요.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와 '항복을 위해 땅을 떼주자'라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만약 이때 자비령 이북을 떼주었다면 고려의 영토 1/4이 사라질 형국이었죠. 

 

출처. 평화전쟁 1019

 

이때 그 유명한 서희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서희는 소손녕이 끌고 왔다는 80만 대군이 허풍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데요.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면 즉시 개경을 침공할 것인데, 국경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의아했던 것이죠. 서희는 우선 소손녕과 담판을 한 후 대책을 마련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대신들은 항복하자는 의견만 고집합니다. 소손녕은 다시 한번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안융진 공격했다가 패배합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소손녕이 허풍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담판을 벌이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출처. 평화전쟁 1019

 

서희는 소손녕과의 회담에서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는데요. 소손녕은 송나라의 격전을 위해 고려와의 화친이 필요했고, 고려의 입장에서는 적당한 선에서 달랜다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기에 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서희는 평안북도 서쪽 일대의 강동 6주를 얻는 성과도 내게 되죠. 사실 당시 강동 6주는 미개발지로 일부 여진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거란이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즉시 강동 6주를 정벌한 후 거란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진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강동 6주는 거란인들에게 통곡의 벽이 되죠.

 

출처. 평화전쟁 1019

 

2차 고려거란전쟁

 

2차 고려거란전쟁은 고려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전쟁입니다.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국가 멸망의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죠.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옹립되었는데요. 화주를 맡고 있던 유종은 고려 조정에 조회하려고 화주에 들어와 있던 여진 추장과 그 수행원 95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여진은 고려에 원한을 품고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복수를 꾀하게 됩니다. 

 

출처. 평화전쟁 1019

 

여진의 협력을 받게 된 요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명분삼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하게 되죠. 고려 조정은 즉시 거란 군을 요격하기 위해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에 임명하고, 30만 대군을 꾸려서 통주로 파견을 보냅니다. 거란군은 강동 6주였던 흥화진에서 양규 장군의 우주 방어로 인해 상당히 난감한 상황을 겪게 됩니다. 금방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흥화진이 굳건히 버틴 것이죠. 결국 20만 대군으로 흥화진을 포위한 후 남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통주로 이동해 강조의 30만 대군과 대치합니다. 

 

출처. 평화전쟁 1019

 

서전에서 강조는 검차를 활용해 승리를 거두면서 거란군을 얕보게 되는데요. 결국 거란군에 대패한 강조는 포로가 되고 고려의 정예군 30,000명이 전사합니다. 즉, 고려의 주력이 소멸한 것이죠. 강조의 대군을 격파한 성종은 즉시 남하해 서경을 공략합니다. 서경 공방전에서 거란군에게 대패함에 따라 지휘부와 주력군이 사라지면서 혼란에 빠지지만 중간급 간부들의 노력으로 서경을 방어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에 성종은 바로 개경으로 진격해 함락시키면서 궁궐과 민가를 불태우는데요.

 

출처. 평화전쟁 1019

 

당시 현종은 강감찬 등의 장군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면서 그들에게 전쟁을 맡기고 몽진을 결정합니다. 피난길에 오른 현종은 수차례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무사히 극복해내고 나주에 도착합니다. 만약 현종이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면 병자호란처럼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을 것입니다. 결국 거란은 후방의 위협으로 개경을 함락한 후 대대적인 철수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기습을 받아 수많은 거란군이 목숨을 잃게 되죠. 

 

출처. 평화전쟁 1019

 

3차 고려거란전쟁:) 강감찬 장군과 귀주대첩

 

2차 고려거란전쟁을 겪었던 고려는 북송과의 교섭을 통해 지원을 받으려는 시도를 하는데요. 북송은 고려가 오랜기간 동안 조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요성종은 고려에 왕이 직접 입조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하라는 요구를 하는데요. 이 또한 고려에서 반환할 수 없다고 하자 요성종은 무력으로 강동 6주를 빼앗겠다고 지속적으로 공격을 하는데요. 고려는 이를 잘 방어하였고, 이로 인해 거란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은 고려에 조공 사절을 보내기 시작하죠.

 

출처. 평화전쟁 1019

 

1018년 거란은 소배압을 도통으로 소굴렬을 부통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합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요격할 준비를 하죠. 거란군이 10만에 고려군이 20만이라는 숫자만 비교하면 군사가 많은 상황에서 방어를 하면 유리해 보이지만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고려는 정예병이 증발한 상황에서 오합지졸 신병들까지 탈탈 모은 병력이었습니다. 반면, 거란은 여전히 당대 최강의 유목 기병을 이끌고 있었죠. 

 

출처. 평화전쟁 1019

 

강감찬은 흥화진으로 출정해 정예 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을 시킨 후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막았다가 거란군이 도하하는 중에 수공을 가한 후 기병돌격으로 승리를 합니다. 이 일화가 훗날 귀주대첩에서 수공으로 승리를 했다는 일화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죠. 왜냐면 실제 귀주대첩은 수공과는 상황이 없이 대회전을 벌였던 전투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국지전에서 고려군이 승리를 하였으나 거란군의 기세는 여전히 강했습니다.

 

출처. 평화전쟁 1019

 

소배압은 국지전에서 패배하면서 개경까지 가는 길에 있는 거점들을 무시한채 개경으로 진격을 명령하는데요. 일부 사람들은 잘못된 전술이라고 평하지만 조선시대 여진의 군대가 한양을 함락한 후 남한산성을 포위해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것을 보면 전략은 나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고려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죠. 특히 2차 고려거란전쟁을 경험한 현종은 훌륭한 안목을 가진 국왕으로 성장했고, 소배압이 개경에 당도했을 때 현종은 전술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청야전술을 활용해 버티기로 결정합니다. 현종의 이러한 결정은 최고의 선택이 되죠. 만약 2차 고려거란전쟁처럼 몽진을 하다가 사로잡힐 위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평화전쟁 1019

 

개경까지 진격한 소배압은 거듭된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개경을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당시 현종은 정찰을 나온 300명의 거란 기병을 상대로 야간 기습을 통해 전멸시키는 쾌거를 거두기도 하는데요. 이때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역발상으로 정찰병을 전멸시킴으로써 지속적으로 버틸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배포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죠. 

 

출처. 평화전쟁 1019

 

결국 10만의 거란군은 후퇴를 하던 중 고려군과 귀주에서 대회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귀주를 통과할 것을 예상하고 전 병력을 귀주로 총집결하였는데, 김종현의 1만 병력은 도착하지 못한 채 결전을 벌여야 했는데요. 거란군은 귀주성 앞쪽으로 2갈래의 하천이 흐르는데, 이 하천 하나를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을 선택합니다. 거란군은 이미 수만리 길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지쳐있었으나 최강의 유목 기병의 능력을 여전했습니다. 두 군대는 대회전을 벌이면서 치열한 혈투를 벌였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도착하지 못했던 김종현의 1만 병력이 기적적으로 거란군의 후방에 등장하면서 거란군은 매우 당황하였고, 고려군의 일방적인 학살의 전장으로 바뀝니다. 

 

출처. 평화전쟁 1019

 

또한, 대회전을 벌이던 중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면서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고려군에게 유리한 바람으로 작용되었습니다. 거란군에게는 역풍이 되었기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죠. 결국 귀주에서 벌어진 전투는 고려군의 값진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거란으로 돌아간 병력은 10만 중 수천에 불과했다고 하며, 소배압 역시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들판에는 거란군의 시체가 뒤덮었고, 포로와 전리품이 산더미였다고 합니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거란군은 다시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범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는데요. 

 

출처. 평화전쟁 1019

 

고려 역시 더이상 대규모 대회전을 벌일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기에 대외적으로 요나라에 형식적인 복속을 하기로 결정하고 조공을 바치게 되는데요. 합리적인 외교를 통해 앞으로 거란이 쳐들어왔을 경우를 대비해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구축하는 등 방어에 신경을 쓰게 되죠. 그리고 강감찬은 고려의 영웅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귀주 대첩은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대회전을 벌였던 전투 기억될 것 같네요. 

 

출처. 평화전쟁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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