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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우왕 재위 기간, 죽음, 가계도

알풀레드 2021. 12. 1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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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전반부에 등장한 고려 32대 왕인 우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태종 이방원'에서 우왕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는 임지규 씨로 전형적인 폭군의 모습과 그 이면에 담겨 있는 감정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속 고려 우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출처. 태종 이방원(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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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우왕은 1365년에 출생하여 1389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재위 기간은 1374년에서 1388년으로 약 14년 간 왕위를 유지하였는데, 9살 때 왕위에 올라 제대로 왕 노릇도 못하고 이용만 당한 것으로 알려졌죠. 권신들에 의해 질풍노도의 청년기에 상당한 폭정을 하여 역사적 평가도 좋지 않지만 작은 동정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우왕)>

 

고려 우왕을 설명하기 전에 간단히 앞선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왕의 아버지는 역사 교과서에서 반원 정책을 펼치며 개혁에 앞장 섰던 공민왕입니다. 반원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신돈, 이인임, 최영 등이 있으며, 젊은 관료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등이 있습니다. 그중 공민왕 집권 시기 개혁을 위해 몸 바친 충신인 이인임은 공민왕 사후 권신이 되어 나라를 말아먹는 장본인이 됩니다. 

 

<출처. 정도전(이인임)

 

우왕은 평생 출신에 대한 의혹을 받게 됩니다.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왕이기 때문에 신돈의 자식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은 것이죠. 우왕의 어린 시절 아명은 모니노(석가모니의 모니와 노비의 노자가 합성된 말로 석가모니의 종)였습니다. 왕에 오르기 전 모니노는 어머니 반야와 유모 장씨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죽게 됩니다. 어린 시절이 부모를 잃고 그나마 의지하던 유모까지 죽는 것을 본 모니노의 성격이 어떻게 될 지 짐작이 되죠.

 

<출처. 정도전(이인임)

 

신돈의 여종에게 태어난 왕이라고 하면 정통성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는 우왕은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명분을 세워서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위하기 까지 했습니다. 공민왕 사후 이인임 등이 우왕을 옹립하였고, 이인임과 그의 신임을 받았던 최영이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합니다. 

 

<출처. 정도전(공민왕)

 

이인임이 공민왕 시절처럼 나라를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일으키려고 했던 열정이 남아있었다면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겠지만... 권신이 되어버린 이인임은 우왕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치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우왕 역시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제거 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야 했을 것 같구요. 그렇기 때문에 음주가무를 즐기며 향락에 빠져 지냈고, 정치는 이인임 등 권문세족과 최영에게 일임을 했다고 하죠. 적당히 놀았으면 될 것을 백성들을 괴롭히고, 엽기적인 행위를 일삼으면서 그야말로 타락을 해버렸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최영)>

 

눈치 밥을 먹으며 생활하던 우왕이 청년이 된 후 실권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인임은 이미 나이가 들어서 정계에서 은퇴할 시기가 오자 기회를 포착하는데요. 우선, 최영을 포섭한 후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이인임의 후임인 염흥방 등이 난행으로 인해 조반의 옥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인임 일당을 제거하게 되죠. 이로 인해 최영과 이성계가 고려 정계의 핵심이 되었고, 최영은 최고 권력자로 자리매김합니다. 우왕은 최영의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하고, 최영을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후비로 맞이하기도 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우왕)>

 

문제는 중국에서 원명교체기를 맞이하면서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겪게 되는데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고려에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합니다(철령위 문제). 최영은 즉시 요동 정벌을 주장하고 우왕은 그를 지지하였는데요.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최영과 우왕은 요동 정벌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이성계(좌)와 조민수(우))>

 

요동 정벌군을 꾸린 후 선봉대를 압록강까지 진군한 상황에서 정작 최고 사령관인 최영은 서경에서 발이 묶이에 됩니다. 최영을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던 우왕이 최영에게 가지 말라고 청하였고, 현장에 있던 이성계와 조민수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 전군 5만을 이끌고 개경으로 처들어 오게 됩니다. 최영이 현장에 당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알 수 없지만 무리한 요동 정벌로 인해 우왕과 최영이 몰락하게 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죠. 

 

<출처. 태종 이방원(우왕)>

 

이성계와 조민수가 개경을 포위 후 함락하고 최영을 제압하게 되면서 우왕은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인임 시절을 경험한 우왕은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에 의해 결국 자신은 이용만 당하다가 사사될 것을 우려한 것인지 군부의 수장인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환관 80여 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으로 쳐들어 갔지만 마침 두 사람은 군영에 남아 있었고, 반대로 우왕은 이성계의 공격을 받아 폐위당한 후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우왕)>

 

우왕이 폐위된 후 후사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성계와 조민수가 권력 투쟁을 하다가 조민수가 제거되기도 합니다. 결국 우왕의 아들 창왕이 다음 왕으로 옹립되지만 우왕을 다시 옹립하기 위한 반락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자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일당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혈육으로 말아 처형하게 되죠.

 

<출처. 태종 이방원(우왕)>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점은 조선 개국을 주장했던 이들의 주장이라 신빙성이 약하다고 학계에서 보고 있다고 하네요. 우왕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백성을 괴롭힌 점은 동정받을 이유가 없지만 적어도 당대 혼란스러운 정치적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점은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주요 가계도는 아래의 내용과 같습니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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