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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

알풀레드 2021. 3. 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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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는데요. 이에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1916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습니다. 

 

 

 

일제의 만행을 지켜보며 성장한 유관순 열사는 나라를 되찾는데 일조하기로 결심하였는데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시점인 1919년 3.1 운동이 본격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유관순은 3월10일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고향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갔죠. 만세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일본 경찰에 살해되고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은 유관순 열사에게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반드시 네놈들은 천벌을 받고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유관순 열사의 말과 같이 훗날 일제는 패망하게 되죠.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으로 쇠약해져 향년 1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모진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 측은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양도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하네요. 한떄 유관순 열사의 사진을 화폐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아래 사진과 같이 고문으로 얼굴이 심하게 부었기 때문에 그녀의 정확한 얼굴을 알 수 없어 포기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죠.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항거:유관순 이야기 라는 영화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삼일절을 맞이하는 오늘날 유관순 열사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힘쓴 열사들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네요. 

 

 

 

<출처. 유관순 나무위키, 항거: 유관순의 이야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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