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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타잔 박흥숙[꼬꼬무]

알풀레드 2020. 11. 9.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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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일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무등산 타잔이라고 불렸던 박흥숙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는 검사를 꿈꾸던 사법시험 준비생에서 희대의 살인마가 된 박흥숙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박흥숙은 165cm 키에 다부진 몸매, 나이 21세, 일명 박정렬, 얼굴은 둥근 편이고 눈썹이 약간 길며 늘상 해군 작업복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다님"이라는 신상정보가 광주일보(2004)에 실렸습니다. 박흥숙은 전남 영광군 출생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와 형이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살았습니다. 





   비록 가난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쇠수리공으로 일하며 돈을 모아 공부를 하며...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곧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가족이 함께 좋은 집에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었기 때문이죠. 이를 위해 거쳐를 삼은 곳이 바로 무등산이며... 무등산 산자락에 움막집을 세우고 가족들과 함께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박흥숙은 자신의 가족이 살던 무허가 집을 철거하러 온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람으로 세칭 "무등산 타잔 사건"의 주범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3년전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977년 4월 20일 광주시 동구청 건설과 건축지도계 공무원 오종환 철거반장은 직원 6명을 데리고 무등산에 올랐습니다. 7명의 철거반원은 당시 광주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중턱 덕산골(=속칭 무당촌)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무등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인근 무허가 건물을 수차례에 걸쳐 철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마지막 남은 4채 정도의 무허가 건물이 남은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운명의 그날까지 차일피일 철거를 미루며 버티던 사람들이었죠. 





   박흥숙과 철거반원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당시 증언을 토대로 이날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철거반원은 박흥숙의 어머니 심씨를 밀치며 욕을 했다고 합니다. 이전까지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리며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라며 순순히 철거에 응했습니다. 





   철거반원은 움막집에서 가재도구를 모두 바깥으로 옮긴 후 갑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아마 단순히 철거를 한다면 다시 박흥숙의 가족들이 돌아와 살 수도 있었으니 상부에서 완전 전소를 명령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집 지붕에는 박흥숙의 어머니가 무당의 집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 30만원이 있었기 때문에 불이 난 집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본 철거반원은 박흥숙의 어머니를 밀쳐내는 과정에서 쓰러지게 됩니다.





   이후 위쪽에 있는 김복천과 그의 처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박흥숙은 병에 걸린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선처해달라고 요청했고... 철거반원은 이를 수락하였지만 결국 그 집이 불타올랐고... 박흥숙은 분노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에게 거칠게 항의하였고... 철거반장 오종환은 그런 박흥숙을 무시하였고... 그런 모습에 더욱 분노한 박흥숙은 자신이 만든 사제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합니다.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철거반원은 혼비백산하여 몸을 피했고... 오종환을 협박하여 철거반원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철거반원 김영철은 주위에 엎드려 있떤 동료 한문택과 김대옥에게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속히 내려가 경찰에 신고하라고 말했고... 김영철과 이건태, 윤수현, 양관승은 박흥숙 앞으로 나갔습니다. 박흥숙은 이건태를 시켜 오종환을 나일론 끈으로 묶게 했고... 여동생에게 이건태를 묶게 했습니다. 





   박흥숙은 광주시장과 담판을 짓겠다며... 이들을 묶어 두려고 하였고... 여동생은 오빠를 만류했지만 흥분한 오빠를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여동생은 급히 산을 내려가  전화로 시장실로 연락하였고... 전화만으로 안될 것 같아 이후 시장 부속실로 달려가 오빠가 사고를 저지를 것 같다며 직원들과 함께 다시 무등산으로 향했습니다. 





   여동생이 산을 내려간 사이 이 곳에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을 포박한 후 불태운 우리 집에 사과하라고 호통쳤고... 철거반원들은 헐겁게 묶여 있던 포박을 풀고 박흥숙에게 반항하였습니다. 박흥숙은 망치로 그들을 공격하여 5명 중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히게 되었는데요. 이 사건을 사람들은 '무등산 타잔 사건'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은 놀라서 도주하였고... 박흥숙의 여동생은 살인방조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박흥숙의 소재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경찰 발표에서는 박흥숙이 도주한 후 시민의 제보로 붙잡혔다고 합니다. 





   문제는 경찰 발표처럼 시민의 제보로 붙합힌 것이 아니라 재판부는 자수를 한 것으로 인정하였습니다. 특히 박흥숙은 광주에서 여수로 이동하던 중 해외로 나가던 정 모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북한의 간첩으로 의심되는 말을 해 간첩신고를 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찾아 신고한 후 무등산에서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임을 밝히고 자수했다고 합니다. 





   박흥숙은 자신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밝혔습니다. 법정 진술에 따르면 죄를 뉘치고 어떤 극형이든 받겠다고 언급하였는데요. 빈민촌 철거 과정에서 발생한 철거반원들의 폭력이 사건의 배경이라는 점과 박흥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박흥숙 구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박흥숙은 사형 선고 후 3년이 되던 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박흥숙 사건 후 경찰과 언론은 중립적인 사실 보도 보다는 남은 판자촌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몰랐기 때문에 사건을 왜곡하기 시작합니다. 즉 박흥숙의 어머니인 심씨는 무등산에서 거대한 굿판을 벌려 광주시내의 돈을 긁어가는 무당이다라는 기사가 나왔고... 나아가 당시 판자촌과 무등산 일대를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곳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박흥숙이 무예를 연마해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력과 완력을 갖춘 사람처럼 보도하였지만... 박흥숙이 배웠다는 무예는 조선시대의 무예였던 정도술이 고작이었다고 하네요. 특히 박흥숙이 만든 사제총은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박흥숙이 이전에 만든 총이라고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쇠파이프로 만든 딱총으로 산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호신용 무기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도시 빈민에 대한 폭력적인 철거에 기인하여 발생하였습니다. 국가는 가난했지만 꿈 많은 한 청년을 살인자로 몰아세운 것이죠. 정부가 보호해야할 국민을 저버리고... 경제성장에 따른 국가의 도시계획과 건물 철거를 하는 과정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폭력이 얼룩진 사건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출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영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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