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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단심가와 이방원의 하여가, 선죽교 다리에서 최후

알풀레드 2021. 12. 1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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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고려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는 정몽주(1338년~1392년)가 등장했습니다. 정몽주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학문, 외교, 경제, 군사, 정치, 인품 등 모든 면에서 빠질 것 없는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서는 최영과 함께 반드시 넘어야 할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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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여말삼은 중 한사람입니다. 여말삼은은 고려 말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연구한 인물들 중 고려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지칭합니다. 이들의 호인 은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삼은이라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죠. 이들은 비록 조선 건국을 반대하여 은거를 하게 되지만 그들의 제자들은 훗날 조선의 사림파로 조선의 기둥이 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정몽주의 조상은 고려 인종과 의종 때 충신으로 알려진 정습명입니다. 출생지는 경북 영천으로 그가 유년기를 보낸 외가가 현재까지 임고면에 남아있으며, 임고서원에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죠. 정몽주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고려에 성리학이 들어올 시기였습니다. 스승인 목은 이색에게 동방이학의 비조(동방에서 성리학을 시작한 사람)아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이 고려에 들어오기 시작할 즘 몇권 되지 않는 책에 대한 내용에 대해 주석을 달았는데, 후에 중국에서 성리학 서적이 대거 들어오면서 그 내용이 거의 일치했다고 하죠.   

 

<출처. 영천시>

 

1360년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입문한 후 외교관으로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에 큰 성과를 올리게 되는데요. 한 일화에서는 1372년 명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을 때 임무를 마친 후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난파당하여 10여 일을 표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바다를 수색하여 구조되었는데, 이때 정몽주는 외교 국서를 끝까지 지켜내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에 명태조와 주변 신하들이 감탄을 하였다고 하며, 정몽주가 명나라에 갈때마다 큰 대접을 받게 되었죠. 또한, 1377년 일본 규슈에 사신을 가서 왜구에게 끌려간 수백의 고려인을 데리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또한, 1380년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데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몽주는 이성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이성계와의 대립을 예고하고 있는데요. 등장 시점부터 말빨로 이방원을 발라버리네요.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1389년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태생이라 주장하면서 폐위시킨 후 공양왕을 옹립할 때 동참을 했습니다. 공양왕 즉위 후 조정은 그를 옹립한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 9명의 공신들이 장악하게 되는데요. 공신들 중 개혁 세력들은 온건파와 급진파, 중도파로 구분되어 집니다. 온건파는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개혁을 완성해가자는 지용기, 설장수, 정몽주 등이 주도했고, 급진파는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자는 이성계, 조준, 정도전, 박위 등이 있었다. 성석린과 심덕부는 중도파로 저울질을 하고 있었죠.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온건파와 급진파가 팽팽한 힘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중도파였던 성석린과 심덕부가 급진파를 지지하면서 세력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데요. 이때 정몽주는 이색 문하생들을 끌어들이면서 양 세력은 다시 대등해집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이색: 남명렬)>

 

1391년 온건파의 무력적 기반인 지용기가 처의 재종 왕익부의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유배지에서 사망합니다. 잘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전장에서 관우와 장비의 용맹에 비교된 장수였죠. 급진파는 이성계라는 강력한 무력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몽주는 좌절하지 않고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버텨내면서 기회를 노렸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그리고 1392년 3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등청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때를 노려 정몽주는 급진파 핵심 인물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리는데요. 황주에서 이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급히 개경에 도착하지만 지지 세력이 모두 유배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악의 핀치에 몰리게 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이때 이성계는 정몽주를 처단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함을 인지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에서는 많은 고심을 합니다. 한마디로 조선을 개국할 때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던 것이죠. 이러한 이성계의 고충을 안 이방원은 즉시 수하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피살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정몽주를 살해하기 전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방원은 하여가를 정몽주는 단심가를 주고 받은 일화는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전설적인 일화로 자리 잡죠. 

 

하여가                                                                        단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만수산 칡넝쿨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우리도 이같이 얽혀 한평생을 누리니.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출처. 육룡이 나르샤(좌: 이방원(유아인), 우: 정몽주(김의성)>

 

결국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정몽주(역사적으로는 정확히 어디서 살해당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 온건파의 핵심 거두인 정몽주의 죽음으로 급진파를 더이상 견제할 세력이 사실상 무너짐에 따라 고려 왕조는 무너지고 조선 왕국이 건국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아들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노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훗날 세자 책봉할 때 이방원이 가장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삼지 않은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죠. 

 

&lt;출처. 정도전(정몽주: 임호)&gt;

 

이성계는 정몽주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성계 스스로 정몽주를 친구라 부르기도 했죠. 또한, 친명 세력이자 개혁을 함께 주도한 동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몽주는 개혁을 통해 고려왕조의 발전을 기대했지만 이성계는 혁명을 통한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 낼려고 했죠. 이성계는 정몽주가 죽은 후 그의 충절을 폄하하지 않고 오히려 높게 평가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왕조의 충신인 정몽주는 조선 선비들에게 충절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lt;출처. 육룡이 나르샤(정몽주(김의성)&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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