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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및 6월 항쟁의 도화선 이한열 민주열사 사건 개요!

알풀레드 2019. 2. 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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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및 6월 항쟁의 도화선 이한열 민주열사 사건 개요!



   지난 6일 설특선 영화로 방영된 1987을 보고 참 민주화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들어왔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한열 열사에 대해서 조금더 알게 된 계기가 되어... 왜 이 영화를 진작 보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그래서 관련 사건들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영화 1987의 엔딩 크레딧에 함께 등장한 영상인데요.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현장의 모습입니다. 박종철 열사는 1964년 4월 1일 서구 아미동 출신이라고 합니다.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하여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을 하였는데요. 당시 동기들의 말에 따르면 '얼굴이 하얗게 뽀얗고 피부가 맨들맨들한데 두꺼운 안경을 낀 그 당시 귀티 나는 친구'로 기억하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안기부장(문성근)과 박치원(이윤석)의 대사가 기억이 나는데요. '김영삼과 김대중이 간첩만들어서, 박종철 완전히 덮어버리세요.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안기부장)', '내래 빵갱이 잡는거 방해하는 간나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간주하것어(박치원)', '니마루 니아새끼들 임진강에 던져버리겠어. 월북하다 뒤진걸로 처리하겠어. 해봤으니 알겠지?' 




   이말만 보아도.. 그들에게는 진실따윈 중요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고.. 또한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을 하죠. 너무 소름이 돋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이 되었을까요?




   박종철 열사는 대학 생활 동안 동아리 활동과 농촌 활동 등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눈을 뜬 것 같습니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로 닷새간의 구류를 살았고.. 여름방학에는 공활을 하기도 하였으며...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가두시위로 구속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당시 사회 분위기가 노조라는 말만 나와도 빨갱이로 몰아간 것 같네요. 




   1987년 새해는 혹독한 추위 속에... 86년 한해 내내 이어진 수많은 투쟁의 여파로 민주화단체들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결과 건국대 사태 당시 학생들을 옹호하는 성명서 한 장 발표할 단체가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죠. 이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1월 15일자 중앙일보 사회면에서 '경찰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평범한 2단짜리 기사가 실렸습니다. 




   영화 초반에 나온 장면들이 기억이 나는데요. 그날 밤 9시 부검이 이뤄졌는데...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황적준은 물고문 도중 그 대학생이 질식사 한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황적준은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경찰의 협박을 뿌리치고 의사의 양심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16일 박종철 열사는 화장되어 임진강에 유해가 뿌려졌습니다. 




   1월 13일 자정 무렵. 서울 신림동 하숙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세칭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합법적 절차도 없이 불법 납치를 당한 박종철은 각종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댈 것을 추궁받는데요. 영화에서는 김정남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납치를 당하였죠. 




   박종철 열사가 모른다고 하자... 수가관들은 구타와 폭행.. 그리고 고문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지를 수건으로 결박한 후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머리를 박는 물고문을 자행을 하는데.. 박종철 열사는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황한 수사관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증거 인멸을 시도하고 서울지검에 시신 화장을 요청하였으나.. 영화의 내용처럼 거절 당합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던 언론들은.. 이 사건을 파해치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특히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기자였던 신성호 기자가 소식을 듣고 바로 데스크에 보고하여 기사를 내죠. 이후 문공부는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깽판을 칩니다. 완전 조폭수준..




   하지만 신문 보도로 여론이 들끓자.. 경찰은 17일 마지 못해 자체 수사에 들어갔고..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영화에서처럼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날조된 거짓말을 하였고... 오히려 고문 의혹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19일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자백하였고.. 조한경과 강진규를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을 합니다. 




   이후 내용은 영화와 같은데... 구치소에 있던 민통령 사무처장 이부영이 두 경관의 사건 은폐 조작에 대해 알아내고 화장지에 깨알같은 글씨로 써 밖으로 내보냈고.. 결국 세상에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죠.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여전히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이 계속해서 자행이 되었습니다. 2.7 국민추도대회와 3.3평화대행진의 집회를 열었지만.. 공권력에 의해 재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전두환은 이 기세를 몰아 4.13 호헌조치를 내놓았습니다. 이 호헌조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계속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요. 




   이는 군사독재정권에게는 치명타를 맞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교수, 신부, 목사, 교사, 법조인, 의료인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드디어 전면에 나서 전두환의 호헌 선언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성명을 쏟아내었습니다. 군사정권의 공포정치로 인해 국민들 역시 두려움에 나서지 못했던 이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1987년 6월 9일 학생 운동이 일어났으며.. 일부 전투경찰들은 최루탄을 수평으로.. 즉 사람을 향해 쏘았고.. 이것이 이한열 열사의 뒷머리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화에서는 강동원이 이 이한열 열사의 역할을 맡아 열연을 하였죠. 영화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한열 열사는 미남이라고 생각하여 강동원을 섭외하였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어요. 



 

   이한열 열사는 결국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사망을 하였고.. 이 사건은 정부의 폭력진압으로 희생된 사건을 본 국민들의 반감이 가중되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은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일어나 독재정권을 타도해내었죠. 다시는 이런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1987을 보면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에 대해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끝으로 참 아쉬운 점은 영화에서처럼 고문을 자행하고 은폐를 시도한 경찰들과 주요 인사들은 잠깐에 감옥살이 이후 현재까지 고위직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참.. 가슴이 아프네요. 



<출처. 영화 1987 엔딩 크레딧 캡처, 박종철/이한열 열사 나무위키 및 경향신문(2004)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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