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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의 재위기간, 가계도

알풀레드 2021. 12. 1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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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34대 국왕이자 최후의 국왕인 공양왕[재위기간: 1389년~1392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선, 우왕과 창왕과 마찬가지로 묘호가 없는 왕으로 조선 태종이 시호를 공양왕으로 올렸다고 하는데요. 정치적으로 권력이 없는 왕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공양왕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살펴볼까요? 

 

<출처. 태종 이방원(공양왕: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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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 11월 우왕 복위사건이 발생하자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합니다. 폐가입진이란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아들로서 정통성을 부정해버린 것이죠. 

 

<출처. 태종 이방원>

 

공양왕은 제20대 왕 신종의 6세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정창부원군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준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제34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죠.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공양왕: 박형준)>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을 차기 국왕으로 지목한 이유는 왕족 직계와 멀기 때문에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평범한 귀족이었기 때문인데요. 공양왕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한 이성계 등 아홉 대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주요 인물로는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이 있습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

 

반면, 창왕의 즉위를 도왔던 이색과 조민수 등은 유배를 당하게 되죠. 공양왕 즉위 한 달만에 우왕과 창왕은 처형됩니다. 문하시중(조선 영의정의 위치와 동일)에 오른 이성계는 조정을 장악하는데요. 공양왕은 이대로 이성계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고 마지막 저항을 시도합니다. 이성계가 원하는 데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면 명줄은 길어지더라도 결국은 자신은 살길이 없음을 알고 최후의 저항이라도 해본 것이죠. 

 

<출처. 태종 이방원>

 

공양왕은 이색과 변안열을 각각 판문하부사(문하부의 종 1품 관직)와 영삼사사(삼사의 최고위직이자 수장)로 임명해 고려 부흥을 꾀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건 개혁파 정몽주를 끌어드립니다. 정몽주는 고려 최후의 보루로서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려는 것을 눈치채고 공양왕의 지지를 받아 이성계 일파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데요. 

 

<출처. 태종 이방원(공양왕: 박형준)>

 

1392년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보내면서 이성계의 수족을 잘라버립니다. 이때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이성계를 계속해서 공격한다면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조언하지만 공양왕은 수락하지 않았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왕으로서 급진개혁파와 온건 개혁파의 세력 균형을 추구했다고 보입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공양왕: 박형준)>

 

위기를 느낀 급진개혁파는 서둘러 대책을 강구했으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조영규 등의 수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정몽주가 살해됨에 따라 온건 개혁파는 구심점을 잃게 되면서 급진개혁파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완전히 재편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요. 결국 공양왕은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처지에 놓입니다. 만약 공양왕이 정몽주라는 칼을 선택했다면 정몽주를 믿고 칼을 휘둘러보았다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르죠. 

 

<출처. 태종 이방원(정몽주: 최종환)>

 

이성계 일파는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나머지 세력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역성혁명이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392년 7월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합니다. 이로서 고려왕조는 개국한 지 474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출처. 정도전(공양왕: 남성진)>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간성으로 이배되었는데요. 이로 인해 당시에는 지역명을 따서 간성왕이라고 불리기도 했답니다. 1394년 4월 17일 삼척 고돌산의 살해치에서 왕세자 왕석과 함께 사사됩니다. 만약 공양왕이 평화로운 시기 왕위에 올랐더라면 성군의 자질이 있어 좋은 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부유한 귀족으로 유유자적하게 살았을지도 모르죠. 망국의 군주로서 잔혹한 숙청을 당한 운명을 가졌던 공양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주요 가계도는 아래 내용과 같습니다. 

 

<출처. 두산백과 공양왕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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