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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김구 암살자 안두희의 변(辯), 정의봉에 사망!

알풀레드 2020. 4. 5.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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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1일 KBS1에서 방송된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에 대해서 전문가들과 방송인들이 패널로 참여하여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특히 안두희가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이유에 대해서 심도있는 토론을 하였는데... 무수한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죠. 과연...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지... 방송 내용을 근거로 그날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극심한 좌우 대립과 갈등 속에서 유명인사들을 향한 암살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김구의 집무실에서 이윽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일제강점기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떤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혼돈한 해방 정국 안에서 국민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큰 어른 김구. 거목 김구를 죽인 암살범은 다름 아닌 육군 포병 소속 소위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어째서 김구를 죽여야만 했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에 이어 '해방 후 4대 암살'의 완결편 격인 김구 암살 사건의 전말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고 있는 충격적 사건... 현재까지도 김구 선생의 죽음에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누가... 도대체 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하게 된 것일까요? 독일 친구 다니엘 린데만은 비교적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정확하게 해방 후 4대 암살 사건에 대해 소개를 해줍니다. 



   당대에는 이념 대립이 극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1947년 7월에만 테러 사건이 128건이 일어났다고 사망자가 3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해방 전에도 좌우 대립이 있었지만... 광복이라는 큰 목적 하에 이를 눌렀다면... 광복을 한 후 눌렀던 것들이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에 대한 암살이 일어난 곳이 바로 김구의 거처 경교장이라고 합니다. 경교장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26일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로 현재 사적 제465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곳은 이승만의 이화장, 김규식의 상청장과 함께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으로 알려져있죠. 



   김구 선생이 암살 당한 곳은 바로 경교장 2층이라고 하고... 당시 칼 마이던스라는 기자가 총탄이 난 구멍 밖으로 사람들이 엎드려서 슬퍼하는 장면을 찍었다고 합니다. 또한 김구가 안치된 거실에서 호랑이가 그려진 평상을 함께 찍었습니다. 



   이 호랑이가 그려진 평상 장면을 찍은 이유로는... 미국은 백범 김구 선생을 '블랙 타이거'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고 하는데요. 블랙 타이거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로는 김구의 민족주의적 성향, 동양적인 심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의열 투쟁으로 얻은 수식어 블랙타이거...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안두희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로 당시 32세의 대한민국 육군 포병 소위였다고 합니다. 



   역사저널 그날팀은 암살범 안두희에 대해 범행 분석을 실시하였는데요. 유영철, 강호순 사건을 직접 분석한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교수님이 함께 해주었네요. 



   당시 경교장에서 안두희는 낯을 익힌 김구 선생의 측근들과 인사를 나눈 후 2층으로 이동을 합니다. 집무실 창가에 앉아있던 김구 선생과 대화를 나누던 중 총을 발사하여 살해하였습니다. 안두희는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김구 선생의 목과 가슴을 향해 발사하였고... 김구 선생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손을 가렸으나... 결국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되었죠. 


 

   사망 후 검소하고 청렴했던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의 회중시계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암살 직후 안두희의 행동은 어땠을까요? 상당히 특이한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 총탄 발사 후 1층으로 내려와 군모와 계급장을 제거한 후 이 사건은 자신이 저지른 사건이며... 대의를 위해 개인적으로 한 사건이므로 군복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정황이나 증거를 본다면 전형적인 교사에 의한 청부살인으로 의심이 된다고 하며... 특히 심리적 변화를 살펴볼 때 거대한 배후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안두희의 개인 정보에 대해 조사해보면...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여성과 스키 여행을 할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즐긴 것으로 확인됩니다. 학교 생활 중에는 싸움을 했다는 증언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내용을 보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당연시 하고... 기본 적인 사회 질서를 무시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죠.



   이렇게 잘 나가던 안두희는 인생의 큰 위기를 겪게 되는데... 세상이 바뀌면서 비 공산주의자들은 지주였던 집안 재산을 몰수하고... 아버지를 수감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 분노가 내재되어 있어... 어떤 명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명분만 생긴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실행하는 경향이 높은 인물로 분석됩니다. 



   즉 부정적인 행위들이 대의를 위해 한 것으로 합리화를 시켜버리게 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김구 선생이 국가과 민족의 반역자이며... 국가의 장애물이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고 해요. 김구 선생을 암살한 후 자살하지 않은 이유로는 자신이 죽으면 애국자 김구를 죽인 반역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웃긴 점은 이러한 질문을 아무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진술을 했다는 점인데요. 진술 분석 차원에서는 이유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적인 진술로 분석된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행 후 행동 분석을 해보면 대의를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다며... 심리적 방어 기제가 작용되어 자존감이 아주 높아진 행동 패턴이랍니다. 



   김구를 살해한 결정적인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구는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이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주의자였습니다. 1946년~1947년 김구와 북한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였는데요. 



   이런 김구가 1948년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1948년 UN의 남한 총선거를 결의하게 되자 이러다가는 남북이 분단되겠다고 생각한 김구는 3.8 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는데요. 



   이때 김일성과 마주한 김구는 조국 분열의 위기를 막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한곳에 모이는 이와 같은 중대한 회합에 참석하여 분단을 막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대승차원에서 남북 화합을 시도한 김구 선생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한 우익 청년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1949년 초부터 수차례 김구 암살이 시도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안두희는 김구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는데요. 의도적으로 김구에게 접근하여 김구와 함께하는 동료들과 안면을 익히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며 김구의 마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봉창, 윤봉길과 같은 김구의 휘호도 받았다고 하네요. 



   이러한 점을 철저하게 이용한 안두희... 반국가, 반정부, 친공산, 친북한, 쿠데타, 이승만 암살 등의 모든 원흉이 김구라고 주장하며... 김구를 시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에 출두하는 안두희의 모습이 너무 당당하죠? 



   김구 저격 후 경호원과 비서는 안두희를 폭행하였다고 하는데... 5분도 되지 않아 경교장에 헌병대가 들이닥쳤답니다. 그리고 누가 군인을 때려... 라고 말하며 안두희를 데리고 갔다는데요. 안두희에게 호텔급 편의를 국군이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취조관이나 수사관이 안두희에게 어깨를 토닥이며 안의사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참 황당하기 짝이 없죠?  



   이에 술, 담배, 신문, 편지, 면회 허용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 치고는 모든 것들이 자유로웠고... 심지어 안두희는 신문 기자들에게 재판 방청권을 배포했다고 합니다. 즉 안두희는 영웅이자 의사로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당시 사건을 담당한 것은 군부였습니다. 살인과 강간을 제외한 본법 각 조항 범죄가 있는 자는 범행의 시일과 장소를 불문하고 군법회의에서 심판하며... 살인과 강간은 민간재판소에서 진행을 해야하며... 1심, 2심, 3심으로 이어져야하는데... 군사재판에서 단심으로 끝이 났습니다. 어떤 배후 세력이 이와 같은 사실을 숨기기 위한 것인지... 수사, 기소, 재판 등의 공식 기록이 없는 상황이라네요. 



   판결에 대해서 살펴보면... 주한미군대사관 보고에 따르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해요. 4:3으로 아슬아슬하게 무기징역을 받았기 때문에 사형과 무기징역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무기징역과 무죄 사이에서 4:3으로 됐다고 합니다. 이후 점차 감형을 받았다고 하네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형무소 수감자 중 15년 이상인 자는 처형 명령이 내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안두희는 참모총장 지시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특별 지시로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헐... 그리고 현역 군인으로 복직되었다고 하며... 1951년 2월 남은 형기마저 면제가 되었답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네요. 90년대 초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국방부와 군 관련 기록을 조사해보았으나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군에서 전역한 후 두부, 콩나물, 쇠고기 등을 여러 사단과 군단에 납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군납 사업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와 관련된 사업이라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네요. 이에 당시 엄청난 돈을 벌면서 강원도 납세액자 중에서 2~3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사람이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고... 호화로운 생황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인지... 틀림없이 배후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네요. 



   92년 안두희는 다음과 같이 증언을 하였는데요. '1948년 초 사복을 입고 한국말을 아주 유창하게 잘하는 미군이 하루는 서청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누구냐고 물으니 미 정보기관 한국 책임자라고 했다. 그 미군 중령은 1949년 4월부터는 백범을 '블랙타이거'라 지칭하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암적인 존재'여서 제거되어야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음날 고문과 협박이 있었다며 증언을 번복했다고 하고요.  



   4.19 직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시도한 안두희... 그 이유는 전 국민의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인데요. 다행히 미국 이민이 실패로 돌아가고... 수차례의 테러를 받게 되는데... 권중희라는 분이 박달나무로 그를 잡아 때리고 고문했으며... 이때 온갖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바로 미군에 대한 증언이 이때 나온 것이죠. 그리고 다음날 그 이야기를 부정합니다. 



   언론이 다시 안두희를 주목하자... 1992년 한 해 동안 5~6에 걸쳐 증언 번복을 하는데요. 완전히 언론을 가지고 놀았던 것이죠. 2001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된 육군정보문서철이라고 하는 기밀 문서에 의하면 백의사 염동진이라는 내용이 눈에 띄는데요. 바로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맡은 염석진이 바로 염동진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의사는 모든 공산주의자와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려는 조직으로 김구가 반공에서 다른 노선으로 걷게 되자 암살을 시도하게 된 것이 아닐지 하나의 의견이 제시됩니다. 



   김구 암살 2주 후 주한미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문서에는 김구는 암살자의 생을 살았고, 암살자의 앞잡이들과 친구들로 스스로를 에워쌌으며 모든 죽음가운데 그가 가장 잘 이해하던 그린 죽음을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는데... 이는 한인애국단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 의거를 주도한 내용을 암살자, 테러로 미국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죠. 



   김구를 암살자로 평가한 인물인 존 무초라는 인물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던날 훙커우 공원에서 행사에 참여하여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김구 선생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반탁의 중심인 김구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었죠. 



   다만 미국이 암살을 계획, 지시, 실행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로서의 판단은 노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미군정의 핵심인사들은 주한 미군 철수와 함께 귀국을 했기 때문이라네요. 헐.. 앞서 토론한 내용은 그럼???;;;



   민족의 원흉이라 손가락질 받은 안두희... 김구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결국 입을 다물었고... 박기서라고 하는 의인에 의해 정의봉으로 두들겨 맞은 후 사망하게 되면서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게 됩니다. 



   후세 사람들은 결국 시대 상황에 비춰 김구 암살의 배후를 추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당대에 백범이 죽을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내용은 정치계나 군부, 경찰 등에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김구를 암살하라고 지시하였냐? 라는 질문에 국민이나 김구 선생의 지지자들에 의한 역풍의 우려로 껄끄러웠지만 구지 암살을 지시할 사항은 아니였을 것이라고 판단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린 아랫사람들의 독단이 아니였나? 라는 내용으로 정리가 됩니다. 뭐지;;; 뒷간 갔다가 안닦고 나온 기분이..;;ㅎㅎ



<출처. 역사저널 그날 영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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